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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삶이 한순간 무너졌다

영화 <한나(Hannah)>(안드레아 팔라오로, 2017) 리뷰

by 이연미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한나’(샬롯 램플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나를 쫓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 외에는 전적으로 관객의 추측에 맡긴다. 답답한 심정으로 이번엔 한나의 행동 하나, 대사 하나, 표정 하나까지 유심히 살피며 다시 보았다. 그러자 처음엔 놓쳤던 부분들이 보이며 그녀의 일상에 짙게 배어있던 긴장과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평온했던 그녀의 노년에 갑자기 파도에 떠밀려온 거대한 고래 사체처럼 처치 곤란한 커다란 난제가 닥친 것이다.




영화는 한나의 남편이 교도소에 가면서 시작한다. 전사가 나오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정황상 그녀의 남편은 어떤 범죄를 저지른 듯하고 그 범죄는 심각한 아동성범죄로 의심되는 상황이다. 노년인 데다 남편의 태도가 태연해서(교도소에 면회 온 한나에게 남편은 “모두 내가 그랬다고 믿어.”라고 말한다) 일견 누명을 썼나 싶었지만, 이웃의 강력한 항의와 아들의 의절 선언 등을 고려하면 가해 사실은 존재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한나는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꿋꿋하게 일상을 이어가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다. 한나는 남편이 무고하다고 믿는 걸까?


설령 남편이 범죄자라고 해도 그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한나에게 가해지는 폭언과 고립은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 한나는 손자의 생일날 손수 만든 케이크를 들고 아들의 집을 찾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가끔 이용하는 수영장 회원권도 정지 통보를 받는다. 윗집 아이들이 가지고 논 주황색 물감은 마치 <주홍글씨>의 낙인처럼 한나의 손에 묻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옥죄어 오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연기 수업인데, 작품이 절묘하게도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다. “난 다시 너의 종달새가 되었어. 너의 인형...” 한나는 작품 속 노라처럼 남편에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아내였던 걸까? 그래서 여전히 아내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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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무거운 옷장을 옮기다 그 뒤에서 사진이 담긴 봉투가 발견된다. 아마도 남편의 유죄를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인 듯한데, 이후 한나가 취한 행동은 그것을 몰래 갖다 버리는 일이었다. 증거 인멸, 범죄 은닉. 이쯤 되면 한나가 남편의 범죄 사실을 몰랐던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남편이 격분하며 아들을 용서 못 한다고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한 것 같은데, 그런 아들은 엄마인 한나까지 공범자 취급한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남편의 가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소아 성애자라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은 집 안에 있었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한나는 오랜 세월 이를 방관하고 묵인해 왔던 게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한나가 연기 수업에 준비한 대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말이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살 때 그는 늘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것은 남편의 비뚤어진 욕구를 그녀가 알고 있었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그녀가 아들에게 말하고 싶은 진실인 걸까? 한나는 이 말을 차마 끝까지 뱉지 못하고 연습실을 뛰쳐나간다. 한없이 추락하듯 계단을 뛰어 내려가 지하철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위태롭다. 카메라도 더는 그녀의 뒤를 쫓지 않는다. 앞으로 한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녀를 짓누르는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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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이미 남편에게 자신이 사진이 담긴 봉투를 찾았음을 밝혔다. 그리고 남편이 키우던 개도 입양 보냈다. ‘인형의 집’을 떠난 노라처럼 한나도 그녀에게 지워진 의무를 하나씩 벗어던졌다. 이제 해변의 고래 사체를 보러 갔던 날처럼 자신의 문제를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도망치는 것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바다로 떠내려 보내도 번번이 다시 해변에 올라온다는 고래 사체처럼 계속 수면에 떠 오를 문제다. 결국은 부패해서 악취를 내뿜기 전에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참회해야 무너져 내린 삶을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나0.jpg <한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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