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문학동네, 2020)를 읽고
<지복의 성자>(문학동네, 2020)는 <작은 것들의 신>으로 등단해 부커상을 수상한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가 20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그동안 그녀는 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주로 인도의 환경 문제, 빈곤 문제, 종교 갈등을 고발하는 르포르타주를 써 왔으며, 이번 소설은 이 같은 그녀의 활동이 집약된 결과물이자 ‘작은 것들’ -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학살 피해자 등 –을 향한 작가의 여전한 관심과 애정의 산물이다.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 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_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 오라>
그러나 이와 같은 작가의 이력을 모르더라도 <지복의 성자>는 소설 그 자체로 경이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슬픔과 희망이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짜인 삶을 안겨주지만, 비극의 끝이 반드시 절망은 아니라는 것, 작고 미약한 존재도 돌봄과 연대의 활동을 통해 ‘지복의 성자’처럼 누구보다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인도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을 압도적인 서사로 풀어내면서도 보편적인 성찰을 끌어내고 문학적인 성취까지 이룬,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
사람들이 그녀를 서커스 없는 광대, 궁전 없는 여왕이라고 헐뜯을 때에도 그 상처가 그녀의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불어가게 했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음악을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로 삼았다.(p.13)
그녀의 이름은 안줌, 사회의 억압과 멸시, 폭력과 학대를 피해 무덤가에 잔나트(‘파라다이스’라는 뜻) 게스트하우스를 세우고 무연고 시신의 장례를 처리해주는 사람. 상처받은 모두를 환대하고 어머니처럼 안아주는 너른 품을 가진 사람.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임.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더 있나요? 모두가 초대되었어요."(p.14) 이번 소설에서도 아룬다티 로이는 도입부 몇 장면에서 이미 독자를 사로잡는다.
안줌, 그녀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사실 안줌의 본명은 아프타프였다. ‘모든 것이 남성 아니면 여성’(p.19)이라는 언어로 이뤄진 세상에서 그는 남성과 여성의 성징을 모두 갖고 태어났다. 아프타프의 부모는 그가 남성으로 자라길 희망했으나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인식한 그는 열다섯 살에 콰브가(‘꿈의 집’이라는 뜻)에 들어가며 스스로 안줌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콰브가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히즈라들의 공동체다. 히즈라라는 단어는 ‘신성한 영혼이 사는 육체’(p.45)라는 의미로 ‘신의 총애를 받는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존재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콰브가는 안줌처럼 ‘잘못된 몸에 갇힌 신성한 영혼들이 해방’(p.78)되는 곳이다.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p.39)
안줌은 히즈라 공동체에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키우며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키우게 된다. ‘자이나브는 안줌의 유일한 사랑이었다.’(p.48) 하지만 그녀의 평온한 삶은 어느 날 갑자기 폭력적인 사태에 휘말리며 깨지게 된다. 자이나브의 축복을 빌기 위해 떠난 짧은 여행에서 하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 벌어진 충돌 한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 이는 2002년 실제로 벌어진 ‘구자라트 학살 사건’이다. 열차 화재로 순례길에 올랐던 힌두교인 수십 명이 목숨을 잃자, 이슬람교도의 의도적 방화라는 루머가 퍼지고 주정부(당시 구자라트 주총리는 모디였다)는 힌두교인들의 분노를 부추긴다. 이후 구자라트 지역에서 힌두교인의 보복 학살이 수개월 이어져 무슬림 수천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소설 속에서 안줌은 다행히 난민 캠프에서 발견되어 콰브가로 돌아오지만, 일행의 죽음을 목격하고 지옥 같은 일을 경험한 그녀는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녀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히즈라를 죽이면 악운이 따른다’(p.90)는 관습 때문이었다. ‘학살자의 행운’(p.91)이 되고 말았다는 자책에 안줌은 결국 삼십 년을 머문 콰브가를 떠나 묘지에 터전을 잡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교적, 계층적 폭력 사태로 아버지를 잃은 사담과 함께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장례를 치러주며 살아간다. 시간이 갈수록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이들이 늘어난다.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p.117)
소설의 두 번째 파트를 이끄는 또 다른 여성은 틸로타마이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세 남자, 무사, 나가, 비플랍이 복잡하게 얽힌 그녀의 사연은 카슈미르 분쟁의 폭력으로 붉게 물든다. 정부군에 의해 아내와 딸(미스 제빈)을 잃은 무사는 카슈미르 독립투사가 되고, 그를 사랑한 틸로타마는 무모할 정도로 모든 걸 버리고 폭력 속에 뛰어든다. 그 희생으로 그녀가 얻은 것은 한 아이, 인도 공산당 게릴라였던 여성이 경찰에게 윤간을 당해 낳고도 차마 죽이지 못해 시위 현장에 두고 간 아이였다. 결국 틸로타마는 아이와 함께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기고, 이 ‘빛의 실로 연결되어’(p.180) 있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아이는 미스 우다야 제빈이라는 이름을 얻고 사랑과 보살핌을 받게 된다.
자이나브에 이어 미스 우다야 제빈의 어머니가 되어 꿈을 이룬 안줌은 소설의 마지막에 ‘만족감과 성취감에 젖어’(p.572) 모두가 잠든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본다. 미약한 공동체이지만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번 들은 이들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 안에 희망과 슬픔이 너무도 단단하게, 도저히 떼려야 뗄 수가 없게, 한데 엮여 있기 때문’(p.571)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사회를 향한 냉철한 비판 의식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공존하는 이 소설을 ‘결국엔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P.573)이라는 희망 어린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인도 정부에 의해 선동 혐의로 기소되는 등 노골적인 탄압을 받고도 굴종하지 않는 그녀가 말하는 희망은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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