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열린책들, 2025)를 읽고
주인공 바움가트너는 은퇴를 앞둔 노교수로 아홉 권의 책을 쓴 저자이자 현상학자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건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10년 전 사별한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다. 바움가트너는 긴 세월을 함께 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래 그가 겪는 상실감을 ‘환지통(팔다리를 절단한 환자가 이미 없는 수족에 아픔과 저림을 느끼는 현상)’에 비유한다.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p.37) 이러한 인물의 이야기라면 속수무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소설은 바움가트너의 사소한 부주의가 연속적인 사고를 부른 날에서 시작한다. 태워 버린 냄비에 손이 데고 지하실 계단에서 굴러 무릎을 다친 날. 그날은 그 자신의 말마따나 사고로 ‘적어도 죽지는 않’(p.21)았기에 운이 좋은 날이었지만, 평온을 가장한 그의 삶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바로 시커메진 냄비, 대학원 1학년생일 때 아내 애나를 처음 만난 곳에서 산 그 냄비가 그에게 애나와 함께 한 기억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때>라는 사라진 세계가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p.31)했고, 이후 바움가트너는 기억의 파편들을 헤집고 다니게 된다.
시인이자 번역가였던 애나가 남긴 미출간 원고들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바움가트너를 과거로 이끈다. 무수한 기억의 갈래들 속에서 방황하듯 헤매면서도 그는 현상학자로서 끊임없이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산다는 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고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p.68) ‘죽음 뒤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 데도 아닌 거대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소리 없는 무의 진공, 망각의 공허다.’(p.75)
그러던 어느 날 애나의 작업실에서 연결이 끊긴 전화기로 아내와 통화를 하는 꿈을 꾼 바움가트너는 자신의 생각이 애나의 의식을 깨어나게 하고 ‘내세의 삶에서 애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p.80)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지만 바움가트너에게 큰 위안을 안겨준다. 그는 언젠가 들은 「스타니슬라프의 이리들」 이야기에서 이리의 존재를 ‘믿는 쪽을 선택’(p.199)했던 것처럼, 진실이 무엇이든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로 하며 ‘마침내 종교를 발견‘(p.81)한다.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p.123)
과거를 복기하는 일에서 영감을 얻은 바움가트너는 <운전대의 신비>라는 책을 쓴다. ‘인간 삶이란 외로움과 잠재적 죽음이라는 고속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는 통제 불가능한 차’(p.229)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책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도로의 규칙을 어기고 ‘파괴적인 경주’를 벌이는 현재, 자율성을 포기하고 더 높은 힘에 ‘자율 주행’을 맡기다 비극적인 참사를 겪게 되는 미래를 은유적으로 담았다. 이는 애나의 유고 시집을 출간한 것과 더불어 그의 말년의 의미 있는 성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끝에 바움가트너는 또다시 사고를 당한다. 불행히도 이번엔 치명적이다. 삶은 사고의 연속이고 죽음은 우연의 조화라는 걸까? 작가로서의 애나를 논문의 주제로 연구해보고 싶다는 대학원생 베브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 바움가트너는 자동차 사고를 내고 만다. <운전대의 신비> 마지막 페이지의 자동차 사고는 그 자신의 인생 마지막 장(章)을 예견한 거였을까? 혹은 죽음을 통해 그의 저서는 완성된 걸까? 폴 오스터는 투병 중 끝을 예감하며 <바움가트너>(열린책들, 2025)를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을 끝으로 그는 ‘문장을 만드는 인생’(p.129)이라는 종신형에서 마침내 풀려났다. 폴 오스터는 상상력의 힘, 사유의 힘을 끝까지 밀고 나간 이 소설로 자신의 작품 세계의 마지막 장(章)을 완결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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