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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으로 <프랑켄슈타인> 사유하기

영화 <프랑켄슈타인>(기예르모 델 토로, 2025) 리뷰

by 이연미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판의 미로>, <셰이프 오브 워터> 등의 작품을 통해 크리처물의 장인으로 인정받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 면에서 호오가 갈릴만한 작품이라고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메리 셸리의 원작에서보다 엘리자베스의 역할이 비중 있게 다뤄진 점은 좋았으나, 빅터와 크리처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훈훈한(?) 결말은 다소 실망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극과 극으로 치닫는 세상을 우려하여 ‘용서’와 ‘포용’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는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보았지만, 시대적 필요성에 공감하더라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감독이 쉬운 길을 택했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라캉의 욕망 이론을 대입해 설명해보고 싶은 인물이다. 빅터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이른 죽음으로 ‘소외’와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불화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원활하게 되지 않은 인물로 보인다. 빅터가 꿈에서 본 환영(기표)에 임의적인 의미(기의)를 부여하며 ‘계시’라고 믿는 것도 그가 ‘상상계’에 붙들려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막지 못한 아버지가 명성만큼 의술이 뛰어나진 않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결여’를 깨닫고 “누구도 죽음을 정복할 수 없어”라는 아버지 말에 대한 반발심으로 죽음 정복에 대한 ‘강박’을 갖게 된다. 결국 빅터는 재력가 하를란더의 무한한 지원으로 전쟁터의 시체 조각들을 이어 붙여 생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빅터가 동생 윌리엄의 연인 엘리자베스(한 배우가 빅터의 어머니 클라라와 엘리자베스 1인 2역을 함)를 욕망하는 것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연결선 상에서 어머니와의 합일이라는 궁극적 쾌락 ‘주이상스’로 이해할 수 있으며, 간절히 원하지만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대상 a’라고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여러 장면에서 모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빅터와 전쟁에 대한 담화를 나누면서 분노하는 장면과 빅터의 피조물/크리처를 순수한 아이처럼 대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엘리자베스가 크리처에 매혹되고 그와 소통하려 노력하는 장면은 감독의 전작 <셰이프 오브 워터>를 연상케 하는데 마지막에 크리처의 품에 안겨 죽어가는 설정도 비슷해서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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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어린 시절


영화의 후반부는 피조물/크리처의 이야기다. 빅터는 피조물이 ‘빅터’라는 말 외에는 다른 단어를 습득하지 못하자(사실 피조물이 ‘엘리자베스’를 말하지만 빅터는 이를 무시한다) 지성이 없는 실패작이라며 폐기하려 한다. 화재 현장을 겨우 탈출한 크리처는 어느 오두막 헛간에 숨어들고 오두막의 가족들에게 ‘숲의 정령’이라 불리며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눈먼 노인만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언어를 가르쳐주는 등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노인이 죽자 그는 또다시 쫓기는 괴물 신세가 되고 사냥꾼과 늑대, 늑대와 양 사이의 폭력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도 인간들과 어울려 지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빅터를 찾아가 동반자를 만들어달라 요구하고 빅터가 이를 거부하자 분노한다. 둘은 결국 쫓고 쫓기는 관계 속에서 북극에 도착하고 얼음에 갇힌 선박 위에서 대면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모임에서 “피조물/크리처는 언제 자아가 생겼을까” 하는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피조물도 빅터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유일한 타자인 빅터와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를 겪었고 엘리자베스(소타자)를 만나 상상계로 진입했다가 눈먼 노인에게 언어를 배우며 상징계로 들어서게 된다. 자신의 탄생 비화를 알고 빅터(대타자, 아버지)의 결함을 깨닫고 동반자(대상 a)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으나 실현되지 않는다. 그가 성숙한 자아를 갖게 된 순간은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빅터와 선장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는 라캉이 말한 ‘자아의 글쓰기’를 완성했고 비로소 독립된 주체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라캉은 상징계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의미 생산 과정을 ‘자아의 글쓰기’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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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크리처의 이야기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어쩌면 빅터가 크리처의 동반자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더라도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를란더의 재정적인 지원도 없고 작업실도 불타 없지만, 그것보다 애초에 생명이 탄생한 것이 ‘우연의 산물’ 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최종 실험 직전, 하를란더는 빅터에게 죽어가는 자신의 영혼을 그것에 옮겨 심어달라고 부탁한다. 빅터가 그의 청을 거절하자 하를란더는 장치의 부품 하나를 붙들고 협박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때 그와 함께 떨어진 부품에도 큰 충격이 가해져 전기 출력을 모아 생명을 불어넣는 피뢰침 같은 금속 한 가닥이 휘고 말았다.


그러니까 실험이 성공한 것은 바로 그 예상치 못한 사건에서 발생한 ‘에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생명을 창조한 것은 하를란더의 재력도, 빅터의 지력도 아닌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주라는 빅터의 오만함도 애초에 착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생명의 창조, 죽음의 극복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 대상이며, 이루었다고 착각할 뿐 실제로 손에 넣을 순 없다는 점에서 ‘대상 a’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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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의 실험에서 발생한 에러




마지막으로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왜 하필 지금 고전 중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빅터는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그것(it)’이라고 말하며 지성이 없다는 이유를 든다. 엘리자베스는 고통을 느낀다는 건 지성의 증거라며 반박한다. 나중에 크리처가 빅터를 찾아왔을 때도 빅터는 그를 ‘어떤 것(something)’이라고 명명하는데, 그 말을 들은 크리처가 직접 ‘당신이 만든 것은 어떤 것(something)이 아니라 누군가(someone)’라고 정정한다.


AI가 나날이 발전하면서 인공지능 휴머노이드가 현실화될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예측된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피조물/크리처가 아닐까? 인간보다 지성이 월등히 뛰어난 휴머노이드에게 만약 감정까지 부여하게 된다면 그들을 창조한 인간들은 과연 그들을 ‘사물(thing)’이라고 여길까, ‘존재(one)’로 받아들일까? 최근 개봉한 영화 <프레데터: 죽음의 땅>에서 프레데터 ‘덱’은 휴머노이드 ‘티아’를 처음엔 ‘도구(tool)’라고 부른다. 행성에 사는 생명체들의 정보를 모두 보유하고 있으니 그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덱’은 ‘티아’를 ‘공동체(tribe)’의 일원으로 선포한다. 자신의 진짜 부족(같은 종족)을 버리고 말이다. 이는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결말에 보여주는 황급히 봉합된 부자(父子) 관계보다 설득력이 있고 그래서 현실적이다.


결론적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아쉬운 점은 있으나 고전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특히 기술 진보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 욕망이 낳을 새로운 피조물 AI를 떠올리며 앞으로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를 사유하다 보면 영화의 메시지가 한층 깊어진다.


프랑켄슈타인1.jpg <프랑켄슈타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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