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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l 15. 2019

'없던 일'을 노래하다

영화 <레토(2018)> 리뷰 _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영화 <레토(Summer, 2018)>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나는 영화 중간중간에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없던 일’들의 시퀀스라고 답할 것이다. 영화는 실제 ‘있던 일’들은 어둡고 잔잔한 느낌의 흑백 화면으로 담아내는데 반해, ‘있지도 않았던 일’들은 경쾌하고 화려하게 표현한다. 장면의 대비가 워낙 크고 연출이 생소하다 보니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감독이 관객에게 혼란을 주면서까지 영화의 스토리 전개와 다소 상관없어 보이는 ‘없던 일’들을 연출한 의도는 무엇일까?



 

<레토>는 록 클럽에서의 공연도 정부 관리들의 감시 하에서만 가능했고 노래 가사도 철저하게 검열을 받아야 했던 80년대 초반의 소련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은 러시아의 전설적인 로커로 추앙받는 빅토르 최의 밴드 초기 시절로, 풋풋한 뮤지션이었던 그와 당대의 록스타 마이크, 그리고 그들의 뮤즈였던 나타샤를 중심으로 한 청춘과 사랑, 음악에 관한 이야기다.


'여름'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 <레토>하 그 안에 담긴 청춘과 사랑, 음악에 관한 이야기. 따뜻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열정적인 스토리를 기대하게 하지만, 영화는 소련 체제 하에서 억압받는 뮤지션들의 현실을 빛바랜 흑백의 화면에 절제하며 보여준다. 다소 밋밋하고 암울하다 싶을 때 '없던 일'들의 시퀀스가 불쑥 끼어든다.


영화 <레토>의 스틸컷 _영화의 홍보문구 'Music. Love. Youth.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

 

첫 번째 ‘없던 일’은 이들이 처음 만나 해변에서 함께 노래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레닌그라드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등장한다. 적국인 미국의 노래를 부른다며 시비를 거는 남자에 의해 일행 중 한 명이 경찰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한다. 돌연 ‘안경 쓴 남자(회의론자, Sceptic)’가 출현하더니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사이코 킬러(Psycho Killer)’ 노래가 흐른다.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경찰들과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 위에 현란한 자막과 CG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노래가 끝날 때쯤 조금 전의 그 안경 쓴 남자가 다시 나타나 '이건 없던 일임'이라는 푯말을 든다. 그렇게 첫 번째 '없던 일'이 마무리된다. 현실에서는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저항 정신이 ‘없던 일’ 시퀀스에서 마음껏 분출된다.

 

영화 <레토>의 스틸컷 _ 'Psycho Killer(Talking Heads)' 장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날 건드리지 마. 폭발 직전이니까"
영화 <레토>의 스틸컷 _안경 쓴 남자(회의론자, Sceptic) 등장 씬
'이건 없던 일임'


안경 쓴 남자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은 마이크가 사랑에 대한 노래 가사를 쓰고 있을 때다. 회의론자인 그는 조국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록앤롤에 대해 분노한다. 결국 밴드의 다른 멤버가 총으로 그를 쏴 죽이지만 이것도 결국은 ‘없던 일’. 화면 밖으로 유유히 걸어가며 그는 “이런 일들은 하나도 없었어”라고 관객을 향해 말한다. 당시 뮤지션들의 회의적인 마음과 숨겨진 분노가 그를 통해 표출된 장면이다.

 

세 번째 ‘없던 일’은 빅토르와 나타샤가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짧은 장면에서 연출된다. 이기 팝(Iggy Pop)의 ‘패신저(Passenger)’가 흐르면서 트램 안의 승객들이 뮤지컬 배우라도 되는 것처럼 노래를 부른다. 이번에도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이 화면을 채우며 흥겹게 전개된다. 장면의 끝에 자전거를 탄 안경 쓴 남자가 해설사처럼 등장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없던 일이에요”라고 말한다. 아마도 ‘없던 일’에서 표현된 자유분방함은 당시 소련의 현실 속 트램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 <레토>의 스틸컷 _ 'Passenger(Iggy Pop)' 장면

 

또다시 회의론자가 출현하는 장면은 마이크의 공연 장면이다. 그는 갑자기 관객석을 휘젓고 다니며 관객들을 선동하고 공연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다. 흑백의 화면이 컬러로 바뀌며 관객들은 밴드와 하나가 되고 공연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쯤 그는 '이건 없던 일임'이라고 쓰인 종이를 펼쳐 든다. 여전히 현실은 딱딱하고 엄격한 분위기의 공연장. 하지만 ‘없던 일’의 장면에서 밴드와 관객의 록음악에 대한 열정은 폭발했다.

 

안경 쓴 남자(회의론자, Sceptic) *출처_ Google


이후에도 안경 쓴 남자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몇 번 더 등장한다. 그럴 때마다 때로는 노래가 흐르고 때로는 컬러 화면에 그래픽이 나오며 영화를 다채롭게 채운다. 그는 어쩌면 마이크의 분신일 수도, 당대 록앤롤을 사랑했던 청춘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경직되고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열정과 자유, 저항정신과 분노를 마음껏 분출하는 창구로서 감독은 ‘없던 일’들을 연출한 것이 아닐까? 당시 불가능했던 일들을 빅토르의 노래 가사처럼 ‘풍자적’으로 전달하여 관객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빅토르가 성장해 록 클럽에서 단독 공연을 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때 그가 부르는 노래, '난 나무를 심었어'는 시대와 체제의 억압 하에서도 자유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시절 청춘들의 마음일 것이다.  




영화 <레토>의 스틸컷 _ 빅토르 최(1962-1990)의 공연 장면


난 알아. 내 나무가
곧 날 떠난다는 걸 
하지만 그동안은 곁에 앉아
기쁨과 고통을 느껴야지 
이게 내 세상 같아.
이게 내 아들 같아 
난 나무를 심었어. 난 나무를 심었어 
난 나무를 심었어. 난 나무를 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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