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은 내일에 대한 희망보다 아름답다.
30여분을 달리고 숨이 가빠오며 몸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조금씩 페이스가 빨라지고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짧아진다. 몸은 초단위로 버거워지기 시작했고 근수를 조금이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을 유영하고 다니다 이내 당장에 바뀔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하며 점차 속도를 늦춰간다. 안간힘을 쓰는 마음은 저만치 달려 나가고 있는데, 현실에서의 내 몸은 더디 가는 이 자리만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답답한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달리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사실 달리는 순간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제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초보 러너이기에 더더욱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오로지 달리는 순간에는 '몇 분이나 지났을까',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3분만 더 버텨보자'와 같은 생각뿐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달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것이겠고 다른 측면에서는 내 몸이 이겨 내기 버거운 싸움을 매일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집안에만 있는 것보다 일단 나가서 달려보자는 생각이 크게 드는 이유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달리기와 수영을 못했다. 잘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했다. 체력은 약했고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저질 체력 이상으로 컸으니 어떤 스포츠이든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피구는 좋아했고 잘했다. 제한된 시간이 정해진 스포츠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압박감이 덜한 종목이었을 테니) 체력장이나 운동회가 나에게는 달가운 행사가 아니었다. 학급 임원이었음에도 이런 행사에서 난 쭈구리일 뿐이었다. 행사에 필요한 보조도구를 가져오고 준비한다는 이유로 대회의 참여를 회피하려 잔머리도 굴려봤다. 내 인생에서 경쟁 그리고 승패는 피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기에, 이 순간만 잘 피해 간다면 내 인생에서 어두운 부분들을 웬만큼 비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이 무너진 건 그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랑이 넘치는 부모님 덕분에 온전한 독립성을 누리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육체적인 분리가 정신적인 분리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지나서도 물리적 거리가 나의 고유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그러한 환경으로 많은 반항을 동반한 청소년기를 보냈으면서도 종국적으로 부모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대체적으로 이어왔다. 지나는 길 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선택에서 오로지 ‘나의 선택’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었으나 도달해야 하는 그곳은 늘 정해져 있다는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나로 인정받고자 했던 욕심은 부모의 뜻에 따라 행했던 결과들이 내게 준 안락함과 안정감, 무엇보다 인정을 받고 있다는 자기 효능감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고, 변화를 꾀하기에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밀물과 썰물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진정성을 확인했다.
왜 그랬을까
정말 내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부모의 뜻에 양보해야 했던 이유는, 자식으로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정말이지 전혀 아니었다. 때로는 부모의 뜻에 제동을 걸 ‘객기’는 있었지만, 아들의 눈에 항상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오신 부모의 제안을 거스르고 그 이상의 안정된 삶을 누릴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이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기 전, 수영장에 처음 몸을 담그던 바로 그 순간처럼 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안다. 나조차도 내가 내린 결정을 ‘숙고’ 하지 않았고, 그에 앞서 올바른 ‘생각’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나의 것으로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명제를 진실인양 받아들였기에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을 하는 것이 성공한 삶의 전부라고 받아들였다. 다른 대안이 나의 호흡에 스며들 공간은 언제나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이 나의 잠재의식에 너무 깊게 박여버린 나머지 은행원의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 한동안 숨 쉬는 것도 힘이 들었다.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난 나의 의지대로 삶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지만 꽤 오랜 시간 그 선택이 나에게 준 여파는 다양한 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시기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를 괴롭혔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지시하는 바를 충실히 따르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고 운 좋게도 많은 분들 눈에 띄는 직원이었다. 높은 분들의 호감은 관심으로 바뀌었고 애정이 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험은 불손의 표현이었고 누적되어 온 사회적 인정의 욕구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했으니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한 나는 ‘나’라는 존재를 깊이 생각하고 보듬는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나를 누르고 눌러서 기대를 충족시키는 직원이 되는 것이 나의 전부라 여겼다.
문득 그때의 내가 ‘정말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받아들였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할 때가 있다. 그때 후광처럼 뒤에 있다고 생각했던 그분들의 영전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궁금증이 커지기도 했다. 여전히 속물근성이 남아 있는 이유는 지금의 삶에도 일말의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이 역시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허무하고 쓸쓸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권력의 메타포이고, 그 중심에 있는 누군가의 가장 화려한 시기가 소멸하며 주어진 명(命)을 다했을 때는 초라함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삶의 전부였던 힘을 소유하며 권력의 중심이 된 이들도 시간과 역사의 무게 앞에 흔들리며 꺼질 수밖에 없음을 목도한 이후로, 개인의 고유함을 수호하는 삶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땅에 태어나 나에게 주어진 작은 과수원을 오래도록 지켜보는 보잘것없는 소명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몫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부여된 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것은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 그 자체였다. 나라는 존재는 늘 부족함을 안고 살았으니 내가 가진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함은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시인이었고 연약함을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생활하는 것은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라는 수치감 또한 있었으니 욕망이라는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던 시기부터 항상 최고의 이상향만을 고집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 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는 허용가능(?)한 범위에서의 일탈이 전부였다. 노래방을 가거나 포켓볼 장에 가는 것 정도.
대학에 진학하기 전, 열여덟이 되어서야 내가 잘하는 것, 소질이 있는 것, 내가 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그 울림은 부모가 원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기에 환영받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가둬 둘 수 없었던 많은 없었던 생각들은 스스로가 허용하는 수준까지, 다만 최대한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의 인생에 있어 거의 모든 중요한 순간은 일방적인 청약과 승낙의 주체가 동일한 낙성 계약에 해당했고 상당한 기간 동안 내 삶의 대전제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 매 순간이 이러한 삶의 패턴으로 인해 나쁜 결과만을 가져왔거나 원치 않았던 결말로 맺어진 것은 아니었다. 되려 자력으로 기립한 적 없이 누군가의 도움에 익숙해있던 삶에서 도망쳤을 때 한동안 갈 곳을 잃은 아기새 마냥 헤매기도 했다. 그럼에도 모든 이의 만류, 특히나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서른여섯 나이가 되어서야 ‘나’라는 존재로 세상에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었다. 많이 늦었다고 생각했고 가장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나에게 제일 필요했던 결정이었다. 6개월 정도를 새벽에 일어나 눈물로 보내고 다른 대안을 생각할 용기도 나지 않아 나 자신을 원망하고 탓하기도 수만 번이었다.
‘이렇게 사는 나의 끝은 오늘과 같은 모습일까, 그렇다면 대체 이런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일까’
쉽게 정리되지 않았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조금씩 정리가 되어간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나름의 흐름이 있다. 그 흐름 가운데 독립적인 존재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스스로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오늘,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에 몰입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조건인 것이다.
나의 내면이 어둡고 힘들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을 나 자신이 막고 서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기대도, 바람도, 종용을 가장한 통제도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랬기에 늘 최상위 정점을 찍는 무언가가 분명한 목표라고 생각했고 자석 주변의 쇳가루처럼 그 근처에 들러붙어 있어야 성공 비슷한 것이라도 누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잘 살기 위해서, 어느 누구를 만났을 때 꿀리지 않는 당당함으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것들을 가볍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기준과 환경적 요소로 우리의 삶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성공한 인물과 비교되며 그 안에서 기준을 찾고 활용했다. 그들의 삶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관념이 끊임없이 나의 사고 과정에 침투했고 나는 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수용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관념은 나름의 희망을 갖게 했고, 현재 처해있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낀, 쉽게 말해 현타가 온 시점의 끝에는 여지없는 실망만이 남아 있었다.
정교할 것 없는 이 엉터리 프로세스는 이미 나의 뇌에 각인되어 학교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사회로 그 비교의 대상을 넓혀나갔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고 외친 나폴레옹처럼 전 유럽을 나의 통제권 안에 있게 하는 꿈을 꾸는 사람만이 진정한 야망이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꿈에서 깨어났다. 꿈조차도 버거웠으니 단 한순간도 달콤한 적도 없었다. 나의 꿈이 아닌, 그릇된 관념에서 시작된 ‘꿈이어야만 했던’ 골인지점이었으니 달성 할리도 만무했겠으나 소명의식으로 전념을 다해 몰입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역시 포기도 빨랐다.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고 있고 현재 지니고 있는 재능이 무엇인지 탐구해보고 고민해봤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인생의 매뉴얼 같은 이야기를 이제야 비로소 독서와 기록과 사색과 운동을 통해 찾아가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대체적으로 타인과의 비교-> 내 삶에의 가능성 투여-> 그로 인한 희망적인 생각들->현실과의 괴리감이 단계적으로 다가옴->스스로에 대한 실망이라는 흐름을 갖게 된다. 자아에 대한 성숙도가 상대적으로 결여되고 유약한 사람일수록 취약성 또한 크다. 희망을 갖게 되고 이내 현실과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순간 불안에 의한 집착으로 자신의 성취에 대한 성향이 변질되기도 한다. 오류의 출발점은 늘 타인과 비교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각종 SNS에서의 외형적인 요소들에의 장기간 그리고 지속적인 노출은 보이는 것이 전부라 믿게 되는 기이한 사고의 패턴을 정형화시키고 있으며 나의 부족함의 크기가 크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극히 일부 혹은 과장 또는 일부의 거짓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망각한 채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빠르기에 이내 큰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는 것이다.
내 삶에서의 고통은 절반이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니 내 두 손에 쥐어진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잃었고 내 몫의 행복을 맛볼 수 없었다. 멈추지 않을 꿈만 꾸다 허망하게 깨어난 것도 수차례. 의미 없이 흘려보낸 하루하루가 그렇게 원통할 수가 없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충실한 몰입을 간과했었다.
어느덧 마흔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은, 오늘의 삶에 감사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것들에 정성스럽게 힘을 쏟으며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적당한 강도로 지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 사랑의 표현이 진행되고 있는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