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다른 쪽 문은 열릴까?
“언니, 근데 나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을까?”
울먹거리느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그 무엇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커튼을 열었더니 있을 것 같았던 문들이 없고 벽만 보였다. 무엇인가 허망한 마음이 확 쓸려왔다.
겉절이를 담겠다고 강판에 양파를 갈다가 손가락이 쓸린 느낌이었다. 아직 재료 준비에 한창인데 널려만 놓고 버무리 지도 못한 절인 배추처럼 내가 쭈글쭈글하게 보였다. 쓰라렸다. 거창하게 유치원 때 “꿈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했던 답을 떠올릴 것 까지도 없다. 정말 뭐라도 될 줄 알았다. 뭐라도 어디서 매우 잘하고 있을 줄 알았다. 자기 효능감이라고 그런다지? 그런 것을 충만하게 느끼며 살 줄 알았다. 그럴 수 있을 만큼 나름 세상 쫌 굴러본 줄 알았다.
단팥빵을 좀 자주 뜯어먹던 시기가 있었다. 촉촉한 갈색에 설탕시럽이 살짝 코팅되어 두 손으로 가르면 쫀득쫀득한 질감에 호두도 조금씩 박혀있고, 달달한 팥이 가득 들어있는 칼로리 최강자! 단팥빵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인생 영화로 꼽는 ‘앙’이라는 영화가 있다. 단팥빵과 모양은 다르지만 맛이 유사할 것 같은 일본 빵, 도라야키가 나오는 영화이다. 인생의 짐 다 짊어지고 무거워서 휘청거리다가 포기한 것 같은 젊은 남자와 한센병으로 아까운 젊음을 잃어버린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매력이 넘치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취향이라면 생뚱맞을 수 있다. 그러나 머리가 복잡할 때 톡 쏘는 스파클링 한 음료처럼 통쾌한 맛은 없지만 부드러운 홍차 밀크티처럼 입안에 여운이 남듯 음미하기에 좋을 때도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사람들은 타인의 외모를 보고 편향된 정보만으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짓기 쉽다.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주인공 할머니의 팥에 대한 해박함과 정성 그리고 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한 번쯤 눈여겨볼 만하다. 너무 세상을 열심히 살다 보면 나와 내 주변 몇 걸음에 갇혀있기 쉽다. 내가 살아오고 겪은 것들이 지혜가 되기도 하지만 양식장의 가두리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특히 도시에서 오래 살다 보면 차갑고 회색 빛으로 보이던 사람들 속에 어느덧 나도 생존의 갑옷을 입고 동화되기도 한다. 사람들 간의 부딪힘이 반복될수록 잠시 멈춘다. 혹시 나를 잃어버린 지점이 있는지 뒤돌아 본다. 진정 나에게 소중한 가치에 기준을 세우지 않고 휩쓸려 달리다 보면 열심히 살은 만큼 한 참 후에 잃어버린 나를 보게 될 수도 있다.
할머니의 대사에서 ‘특별한 무언가 되지 못해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이다’라는 말은 은은하게 오래 곱씹어보게 되는 말이다.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부모조차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어떠한 형태든 수고의 대가로 자랑이나 공로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도 있지 않은가? 자랑스럽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눈치 보게 되는 존재가 가족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항상 두려움이라는 바위가 등 뒤에서 굴러오는 것 같던 시기가 있었다.
오리에게 고민이 생겼다. 남들하고 다르게 생겼다. 심지어 못생겼다. 다행히 수영은 할 줄 안다. 그런데 따돌림을 당한다. 수모를 당하다가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서 얼어 죽는 순간, 사냥꾼에게 구조를 받지만 집에서도 쫓겨난다. 춥고 외로운 모습이 애잔하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운 아기 오리의 서글픔이 잘 표현되어 있는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못나게 잘 그려서 일까? 감정이 동화된다. 다행히 여러 어려움들을 겪어내고 살아남아서 오리에게 변화가 생긴다. 갑자기 본인의 정체성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구겨지고 찢어져고 지폐는 지폐라고 했던가? 본질의 가치는 잃지 않지만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못나고 어린 백조에게 세상은 가혹했을 것이다. 본인이 멋진 백조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려운 환경을 좀 더 자신감 있게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면서 울분을 삼켰을까?
다행히 그림책의 못난 녀석은 시간이 지나 성장하면서 아름다운 백조가 되었다. 크고 하얀 몸집의 우아한 녀석의 변화는 곧 속할 수 있는 동료가 달라지고 어려운 시절을 겪어낸 겸손을 겸비하여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동화책 속에 살고 있지 않기에 주인공이 잘 살게 된 것으로 안심하고 책을 덮는다. 현실로 돌아와서 한 가지 콕 찌르는 아픔이 있는 지점은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이다. 사실 눈 가리고 아웅 하기 쉬운 대상이 나 자신이었다. ‘내가 원하는 나’, '그렇지 못한 나', ‘남들이 원하는 나’, ‘남들이 평가하는 나’ 잘 생각해보면 사실은 차이가 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나' 그리고 '가능한 나'의 간극이다. 정체성이 단단하다면 갈등을 잘 이겨낼 수 있을 텐데 자괴감과 자책감은 종종 나를 괴롭혔다. 내가 못났다는 스스로의 질책 같았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간들이 지났다.
이제는 인정할 부분을 기꺼이 확 안아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로봇이 커피를 만들어주는 카페가 동네에 생겼다. 신기하고 쾌적하고 빠른 대응에 사람들이 많이 이용을 한다. 뭐라 설명하지 않아도 어디에서든 카페를 지나는 길에도 주문을 해놓으면 찾을 수 있으니 여러모로 간단하다. 커피 맛도 훌륭해서 동네 카페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장 조립라인에서나 봤던 것 같은 로봇의 팔이 왔다 갔다 명령을 잘도 수행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있으니 고장이 잘 난다는 것이다. 고장의 빈도가 잦고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지 소비자는 난감하니 시원한 음료를 기대하고 가볍게 들어왔다가 고장인 줄도 모르고 주문을 하거나 기다리다 이상하니 돌아가는 경우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문제가 즉시 해결되지 못하니 난감하다.
몇 년 전에 카페에 앉아있다가 옆 테이블에서 커피를 쏟는 상황이 벌어졌다. 분명 손님의 실수로 바닥이 흥건하게 난리가 났고 소란스러웠고 직원은 수고스럽고 번거로웠으나 말끔하게 새로운 음료를 내어다 주었다. 그 공간에 있는 동안 소비자가 누릴 수 있는 커피로 이해 따라오는 즐거움들을 놓치게 하지 않겠다는 서비스 의지가 보였다. 그러나 아직 로봇 팔은 한쪽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서 그 정도의 서비스를 해줄 수가 없다. 명령 오류 때문인지 멈추어 움직이지 못할 때가 종종 생긴다. 사람이 와서 정비할 때까지 멈춰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장 난 로봇이 있는 카페를 한 무리의 어려 보이는 직장인들이 나서면서 하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래도! 아직 우리의 일자리는 남아있어. 다 뺏기지 않았어.”
그래, 어디인가 아직 구멍은 남아있으니 너무 미래의 기술이 후다닥 달려오는 것에 겁만 먹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분명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그 디테일은 살아있을 테니까.
만약 지나 온 문들이 닫혔는데 앞으로의 문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난 어디 빛이 한 줄기 들어오는 구멍이 남아있나 기웃거려봐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들은 있겠지. 못난 오리의 방황만큼 나도 많은 방황을 했으니 이제 성숙의 지점에서 '또 다른 가능성 있는 나'를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