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에서 생긴 일 1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던 무렵인 11월, 베트남 호찌민으로 향했다. 지난 몇년간 호주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에 11월은 나에게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간신히 1학년 첫 학기를 마쳤을 때 즈음, 어딘가로 떠나고자하는 강한 열망이 들기 시작했다. 유학비를 벌며 혼자 입학 준비와 비자 준비를 반년, 또 이어진 해외 대학 첫 학기를 버텨낸 다음 반년. 한 해 동안 여러모로 고생을 했었기에 나에게 주는 선물로 짧은 여행을 계획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종강 한 달 전 즈음, 충동적으로 호찌민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호찌민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호찌민행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베트남에 갈 계획이 아니었다. 처음 알아봤던 비행기 표는 방콕행.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몇 친구들이 태국인이었고 그들 덕에 태국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아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태국에 가보고자 했다.
그런데 방콕행은 너무 비쌌다. 왕복 비행기 값이 약 백만 원 정도였다. 이 여행에 쓰기로 계획한 경비는 딱 $1000불, 한화로는 약 90만 원 정도였기에 방콕을 가는 건 금전적으로 무리였다. 경유 없이 숙소비를 아낄 수 있는 밤 비행기로 여행지에 아침 일찍 도착하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비행 스케쥴이었다. 그렇게 비행기표를 추리고 추리다 나온 곳이 호찌민. 물가가 저렴한 동남아에 경유 없이 한 번의 비행에 도착하며 밤 비행기를 타고 가서 아침 일찍 도착하는 곳. 게다가 마지막 날 호텔 1박 포함 왕복 비행기표가 7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장소가 뭐가 중요하리. 그냥 일단 호주가 아니면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호찌민행 비행기를 결제했다.
시간이 흘러 출국 당일. 나는 그날 저녁 비행기였지만 정오가 넘어서도 마지막 기말 과제를 써내리느라 바빠 짐은 하나도 싸지 못한 상태였따. 과제 제출 마감시간인 4시가 되기 5분 전. 간신히 과제를 제출하고 그제야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탔던 비행기는 베트남의 저가항공인 비엣젯이었다. 위탁 수화물을 따로 결제하지 않았기에 내가 챙겨야 하는 가방은 평소에 들고 다니는 검은색 가방 하나였다. 일주일치 여행 짐은 그렇게 순식간에 채워졌다.
베트남, 그리고 호찌민에 대해서는 공항에 도착한 후에 알아볼 계획이었다. 당시에 내가 한 것은 비행기 표 예약과 숙소 예약, 그리고 호찌민 근교인 무이네 왕복 버스 구매가 전부였다. 어차피 이번 여행의 목표는 '휴식' 딱 하나. 알아봐야 할 것은 괜찮은 식당이나 카페, 그리고 베트남에서 필요한 어플 다운로드 정도뿐이었기에 게이트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 체크인을 하기 위해 줄을 서있던 중에 같이 일을 했었던 독일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 왔던 그녀는 일을 그만둘 무렵,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남아시아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동남아로 떠나는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같은 비행기를 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하노이로 가는 길이었지만 직행 비행기가 없어 나와 같은 호찌민행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와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었고 나는 베트남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호찌민으로 향하는 밤 비행기에 올랐다.
호찌민에 도착한 건 새벽 5시 반. 입국심사를 모두 마치고 밖에 나오니 6시가 지나고 있었다. 유심은 따로 알아볼 필요 없이 내가 사용하던 호주 통신사가 하루에 5불(약 4,500원)만 내면 자동으로 로밍을 해주는 제도가 있었기에 로밍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5분, 10분, 15분. 20분이 흘렀지만 로밍이 되지 않았다. 와이파이가 없이는 데이터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씨름하기를 십몇분. 앉을 의자도 없는 탓에 공항에 덩그러니 서서 삼십 분을 핸드폰과 씨름했다.
중요하지도, 재밌지도 않은 핸드폰 로밍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일종의 방어(?)를 위함이다. 베트남에 가면서 환전도 해가지 않은 것에 대한 방어랄까.
나도 안다. 동남아 쪽 국가 여행을 갈 때에는 현금이 필수라는 것.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호찌민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바로 환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통신사와의 삼십 분간의 씨름은 나의 혼을 쏙 뽑아갔다. 나는 그렇게 환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채 공항 밖을 나갔다.
이른 아침임에도 공항 밖은 후덥지근했다. 숙소 체크인 까지는 7-8시간이 남은 상태 였다. 전날 서둘러 집에서 나오느라 제대로 된 저녁도 먹지 못한 나는 쌀국수를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공항 가는 길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본 어느 유명한 쌀국수 집이 아침 6시에 영업을 시작한다고 되어있었기에 다운받아둔 Grab(베트남의 택시/배달 어플)으로 택시를 불러 쌀국수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환전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가려는 식당이 길가에 있는 꽤나 규모가 있고 유명한 2층짜리 식당이었기에 현금 결제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었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1층에는 거의 자리가 없었기에 종업원은 나를 2층으로 안내를 했다. 자리에 앉아마자 나는 쌀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가격은 100,000동으로 약 오천 원. 나중에 여행을 하면서 이게 베트남에서는 꽤나 비싼 가격임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 나는 호주의 높은 외식 물가에 익숙해져 있던 상태였기에 저렴한 가격에 놀라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그리고 이제 계산을 할 차례.
나는 카드를 내밀었다. 종업원은 고개를 저으며 베트남 어로 뭐라 뭐라 이야기를 했다. 카드가 안된다는 말 같았다. 그는 어떤 큐알코드를 가리켰다. 아, 큐알코드로 뭔가 온라인 결제가 가능한가? 하는 생각에 큐알코드를 스캔했지만 창은 열리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에겐 정말 베트남 돈이 단 1원도 없었다. 큐알코드를 계속 스캔해 보지만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큐알코드는 계좌이체를 위한 큐알코드로, 빠른 계좌이체를 위한 링크였다. 베트남에서는 계좌이체로 결제하는 것이 아주 흔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가게마다 그런 큐알코드 패널이 있는데 당연히 그걸 사용할 수 없었따. 계산을 도와주던 직원 포함 위층에서 쉬고 있는 듯 보였던 나머지 직원 2-3명도 나를 보고 있었다. 번역기를 돌려 뭔가 소통을 해보고 싶었지만 2층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데이터가 터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1년 같은 1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들에게 가방이나 여권 등을 맡기고 돈을 인출해 오겠다고 말을 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당황을 하면 머리가 새하얘진다고들 하던가. 내가 그랬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베트남 돈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갑을 열었다. 지갑에는 호주 달러로 딱 10불(한화로 약 9000원) 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있었다. 호주는 현금이 아예 필요 없기 때문에 나는 보통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아마 몇 주 전, 내가 카드로 한꺼번에 결제를 해서 친구가 계좌 이체 대신 건넨 현금이었을 것이다. 그 돈을 보자 베트남을 여행할 때 미국 달러로도 결제가 가능하다는 글을 본 것을 떠올렸다.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은 미국 달러가 아닌 호주 달러였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호주 달러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처음과 똑같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번역기에 '호주 달러로 결제할 수 있을까요?'를 적었다. 잘 터지지 않는 데이터로 인해 번역을 돌리는 데에도 거의 몇십 초가 걸렸다. 내 계산을 도와주던 직원은 식당 구석에 앉아있던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직원에게 베트남어로 무언갈 물어보았다. 나는 급하게 환율을 검색하여 내가 들고 있던 호주 돈 10불이 베트남 돈으로 얼마가 되는지를 보여줬다. 뒤에 앉아 있던 그 직원은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옅은 웃음기를 띈 얼굴로 내 담당 종업원에게 대답했다. 담당 종업원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okay라고 이야기했다. 호주 달러로 결제를 받아주겠다는 말인 듯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무사히 카드를 받지 않는 베트남 식당에서 호주 돈으로 결제를 하고 나올 수 있었다.
이건 나중 일이지만, 현금 인출하는 것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다. 혹시나 해서 환전소를 갔더니 현금으로만 환전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대로 뒤돌아 나오기도 했고, 돌아 돌아 도착한 atm기는 해외카드 사용 불가로 현금 인출이 불가능했으며, 해외카드가 가능하다던 atm 역시 atm 안에 돈이 없는 것인지 인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호찌민에 도착한 당일은 카드가 가능한 곳들만 찾아다니며 여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atm 등을 4-5곳 돌아다니고서야 간신히 저녁에 해외카드로 현금 인출이 되는 곳을 찾았고 그렇게 겨우겨우 베트남 현금 인출을 할 수 있었다.
아마 나처럼 베트남에 가면서 현금을 안 들고 가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일어난 이 사건은 전적으로 나의 준비 부족이자 멍첨함 탓이다. 그래도 혹시나 베트남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현금을 잘 챙겼는지, 혹은 현금 환전의 계획이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