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에서 생긴 일 2
이 모든 일은 호찌민에 도착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약 22시간이 지난 시점에 벌어졌다.
여행 첫날,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 5시 반에 호찌민에 도착한 나는 현금을 안 가지고 와서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나름 즐거운 첫날을 보냈다.
생활비와 학비에 쪼들리는 유학생이기에 이번 여행에서 쓸 수 있는 돈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잠자리에 크게 예민하지 않고, 보통 다른 곳에 여행을 가도 호스텔에 머무는 지라 베트남에서의 숙소도 호스텔을 선택했다. 호스텔은 4인실. 전에 8인실, 혹은 그 이상도 써본 적이 있던 터라 내 기준 꽤나 좋은 조건이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하룻밤에 만 사천 원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내 호실은 대략 이렇게 생겼었다.
깔끔하게 벽에 붙어있는 두 개의 이 층 침대, 그리고 침대마다 붙어있는 커튼까지. 숙소는 아주 청결하고 좋았다. 나는 오른쪽 1층의 침대를 썼고, 내 왼쪽에 있는 2층 침대에는 스웨덴에서 온 친구로 보이는 두 여자가 있었다. 내 위층에는 저녁 10시가 넘도록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른 아침에 도착하여 저녁 8-9시가 넘도록 후덥지근한 호찌민을 돌아다녔던 터라 피곤했던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저녁 10시에 잠에 들었다.
'쿵'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소리는 커튼 너머 내 침대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였다. 그러나 잠에 완전히 취해있었던 터라 꿈인가?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한 5분 즈음 지났을 무렵, 전등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커튼 안으로도 밝은 빛이 조금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속닥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계속되는 말소리에 잠이 조금 달아난 나는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했다. 내 옆 침대를 사용하던 스웨덴인 2명이 한 명은 바닥에, 한 명은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물었다.
그들 중 바닥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나를 보더니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 아주 간단하고 짧은 단어 하나를 뱉곤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봤다. 마치 '어쩌라고?'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싸가지없는 태도에 빈정이 조금 상했지만 그냥 그런 성격이겠거니, 정말 아무 일이 없었겠거니 하며 다시 커튼을 치고 잠에 들고자 했다. 그때 확인 한 시간은 대략 새벽 3시 반. 한밤중이었다.
다시 잠에서 깬 건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3시 45분 즈음이었다. 불이 꺼져있어 방은 깜깜했지만 내 커튼 너머로 누군가의 고통에 찬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fuck,... fuck...!'라며 스스로에게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까 들은 '쿵'하는 소리가 환청이 아니었나? 누군가가 2층 침대에서 떨어지던 소리였나? 그러기에는 아까 커튼을 젖히고 봤을 땐 그 스웨덴 여자 2명밖에 없었는데? 아님 내가 기억하는 순서가 잘못된 건가?
잠이 서서히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다시 커튼을 열었다.
내 침대 바로 앞에는 한 백인 남자애가 엉거주춤하게 주저앉아있었다. 그가 그 고통스러운 신음의 주인이었다. 여성 전용 방을 선택했다고 생각했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일단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6인실까지만 여성 전용방이 있고 4인실부터는 혼성 도미토리였다. 아무래도 4인실에 꽂혀 제대로 설명을 읽지 않고 예약을 한 듯하다)
'무슨 일 있어?' 나는 물었다.
그는 너무 아프다는 말만 반복했다. 방안이 너무 깜깜해 어디가 아픈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단 방 불을 켰다. 불을 켜자마자 보인 건 손이었다. 그의 오른손 중지에는 상처가 나다 못해 형형색색으로 곪아있었다. 나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후 1층으로 내려갔다. 리셉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직원에게 부탁해 구급상자에서 약과 밴드, 그리고 붕대를 가지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밴드를 붙이기엔 이미 상처 부위가 너무 부어있었고 곪을 대로 다 곪아있었다. 약을 바르려 상처 근처에 살짝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그는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아파했다. 붕대를 헐겁게 감는 데에만 해도 한 세월이 걸렸다.
처음엔 그가 2층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손을 다쳤나 보다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상처는 어딘가에 베어서 난 상처였고 방금 다친 거라기엔 오래되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나흘 전에 칼에 손을 베인 상처라고 하며 손가락 보다 더 아픈 건 왼쪽 발과 종아리 쪽이라고 했다.
상황을 정리해 보니 그는 나흘 전, 녹슨 칼로 과일을 자르다 손을 베었고 여태까진 손이 살짝 아프긴 해도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기에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새벽, 자는 도중에 갑자기 왼쪽 발부터 종아리 쪽이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해 잠에서 깬 것이었다. 쿵 소리가 난 건 왼발이 너무 아파 차마 사다리를 제대로 디딜 수 없어서, 거의 떨어지듯이 내려왔기 때문인 듯했다.
이건 분명 감염이다. 거의 썩어버리다 싶은 상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본인은 여태 약을 계속 발라왔다고 했지만, 그의 상처는 절대 시중에서 파는 간단한 약 따위로 치료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당장 병원에 가라고 말했다. 이건 전문적인 소독이 필요한 정도의 상처이며 아마 이 상처에서 시작된 감염이 발까지 퍼져 지금 이렇게 아픈걸 거라고 했다.
그는 병원에 가기 싫다며 그냥 진통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구급상자에 진통제는 없었고, 내가 보기엔 그저 진통제를 먹는 걸로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상처가 아니어 보였다. 나는 그와 한참을 병원에 가느냐 마느냐로 실랑이를 했다. 마치 주사가 무서워서 병원에 가기 싫은 초등학생 조카를 어르고 달래는 기분이었다. 일단 잠이라도 재우자 하는 마음에 다시 1층으로 내려가 호스텔 직원에 혹시 근처에 문을 연 약국이나 아님 진통제를 살 수 있는 작은 상점이 있냐고 물어봤다. 당연히 새벽 4시에 그런 곳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아파하고 있었다. 삼십 분이 넘게 지속된 실랑이에 지친 나는 반 협박식으로 그에게 죽은 송장 치우기 싫으니 빨리 병원에 가라고 이야기했다. 커튼을 젖히고 우리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두 스웨덴 친구들에게도 그의 통증이 감염 때문인 것 같지 않느냐고, 병원에 가야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솔직히 그가 병원에 가야 할 것처럼 보인다고, 감염 같아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협박(?)과 그들의 대답을 들은 후에도 계속 병원 가기 싫다며 칭얼거렸지만 결국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그가 쓰던 호실은 3층에 위치해 있었고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1층으로 가기 위해선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했다. 그는 왼발로 땅을 제대로 딛고 있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를 거의 반 엎다싶히 하여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나보다 최소 20cm는 커 보이는 다 큰 성인 남자를 부축하며 내려오려니 죽을 맛이었다. 시원한 실내 에어컨 덕에 숙소 내부가 조금은 쌀쌀하다 싶었는데 그 짧은 순간만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나기 시작했다. 2층에서 1층으로 우리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직원이 올라와 그를 부축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내가 그 밤 중에 몇 번이나 리셉션에 내려가 이것저것을 부탁하며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에 직원은 이미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 주변에 아는 병원이 있냐고 묻자 그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구글맵을 열어보니 차로 약 15분 정도의 거리에 작은 병원 하나가 보였다. 직원에게 병원 이름을 보여주며 이런 상처도 치료가 가능할지 묻자 그는 종합병원이라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직원 택시를 잡아주겠다며 호스텔 앞 도로에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길거리는 어두웠고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Grab(베트남의 배달/택시 어플)을 열어 택시를 불렀다. 두 번의 시도 끝에 병원으로 가는 택시가 잡혔고 그렇게 나는 그와 새벽 4시 반의 베트남 호찌민에서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