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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Sep 07. 2015

한 달에 한 도시씩 여행하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환상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마이케 빈네무트

어느 절망적인 금요일 오후 퇴근길이었다. 시청 근처에서 기가 빨리다 못해 질릴 정도의(그게 그건가?) 미팅을 마치고 습관처럼 광화문으로, 서점으로 발길이 향하고 있었다. 미팅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없다면 우울해진 마음이라도 이전으로 돌려놓아야만 했다. 


기분이 좋아질 명약을 찾기 위해 서점을 종종거리며 돌아다녔다. 내가 한 가지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남보다 비교적 회복탄력성이 좋다는 거다.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도 감동적인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면 금세 동기부여가 되서는 '그래, 기왕 한 번 사는 인생, 뻑적지근하게 살진 못하더라도 좀 더 성실한 게 낫지 않겠어?'하며 스스로 cheer up을 할 줄 아는, 쉽게 말해 무척 단순한 성격이다. 


해답을 찾는 방법을 알기에 해답으로 가는 지도를 찾아야했다. 경제/경영, 인문/철학을 맴돌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본 책표지가 순간 스쳤다. '어떤 외국 여자가 여행하는 책이었는데... 혼자서 여행하는 내용일테니 내 스타일이고 또 슬렁슬렁 넘어갈테니 주말 안에 휘리릭 읽겠지? 가만 보자, 에세이 쪽으로 가볼까?' 그리하여 주말동안 우울함을 치료할 명약은 독일의 저널리스트 마이케 빈네무트가 쓴 여행 에세이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이다. 


나의 친한 독일인 언니가 된 것 같은 마이케 빈네무트, 실물보다 예쁘게 잘 그렸다.



한 달에 한 도시를 여행하는 독일의 50대 싱글 여성 언론인이라... 빌 브라이슨 급은 아닐지라도 대략 사이즈가 나오는 것 같았다. 유쾌하면서도 시니컬한, 유연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런 유럽인(!)의 시선이 아닐까? 결론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유쾌하면서도 따뜻했지만 마냥 순수하거나 매사 행복이 흘러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인종을 뛰어넘어 50대 싱글 여성이라는 특정한 편견도 여지없이 깨부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매사 완벽하고 꼼꼼하며 우아할 것 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실수 투성이에 방황과 번민을 거듭하는 그냥 우리 또래의 '흔녀'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자기를 보는 시선이 매우 솔직한 동시에 존중이 넘쳐 고난으로 가득한 시기에도 자기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잘 찾는 사람이었다. 즉, 나의 롤모델 내지는 쫓아다니고 싶은 독일인 언니같았다. 


사실, 표지를 넘기면 있는 제목과 판권에 대한 구구절절한 소개 뒤에 바로 따라오는 종이에 적힌 한 줄에 나는 이미 취향을 저격 당해버렸다. 처음 들어보는 아나이스 닌이라는 독일의 (유명하다고 한다) 소설가가 한 이야기가 딱 한 줄 적혀있었는데.. 


삶은 용기에 비례해 넓어지거나 줄어든다.


이때부터 이미 이 책을 고른 순간과 나를 찬양했다. 흔하디 흔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두려움으로 가득찬, 관계를 지속하기에는 피로감에 허덕이는 지금의 나에게 '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일단 니가 지금처럼 산다면 그냥 그렇게 앞으로 쭉 살게 될거야'라고 경고하는 이 한 마디가 나를 푹-하고 찔렀다.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재빠른 공격이었지만 따뜻한 어루만짐과 같았다. 이런 공격 내지는 토닥임은 계속됐다. 특히, 코펜하겐에서는 홍수가 난 줄 알았다. 


여기서, 이 책의 줄거리라기 보다는 마이케 빈네무트의 사연을 잠깐 브리핑 하자면.. 우리나라의 1대100같은 독일의 퀴즈 프로그램에 도전자로 참여하게 된 마이케는 마지막 문제를 방청객 찬스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우승해 50만 유로, 우리 돈으로(브런치에 글을 쓰는데 네이버에 환율을 검색하다니...) 6억원이 넘는 돈을 상금으로 받는다.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백도 살 수 있지만 이 언니는 여행을, 그것도 한 달에 한 도시씩 1년을 여행하기로 결정하고 가고 싶은 도시를 무작위로 결정한다. 매달 1일에 그 도시로 출발해 매달 마지막날에 다음 도시로 떠나는 이 여행의 첫 도시는 '시드니'였다. 그녀도 거품을 물고 얘기하지만 1월의 시드니는 그 찬란한 햇살과 푸르른 하늘과 바다로 물든 정말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시드니에 대해서 할 말이 정말 많지만, 암튼.. 그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 뭄바이, 호놀룰루, 코펜하겐, 텔아비브, 아디스아바바 등등을 1년에 걸쳐 여행하는 듯 일상을, 일상인 듯 여행을 즐긴다. 사실 말이 쉽지, 1년을 여행하는 건 힘들거...라기보단 얼마나 좋은가! 누구나 꿈꾸는 특히, 한국의 싱글 여성이 가장 꿈꾸는 삶이 아닌가, 한 달에 한 도시씩 여행하기! 그런데 읽는 내내 '부럽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나의 친한 독일인 언니는 사실 이렇게 생기셨다(그림도 뽀샵을 한다). 180이 넘는 키에 서글서글한 동안 외모.



그녀는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라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으면 어디서든 작업을 할 수 있기에 아마 이 여행을 결정하기가 더 쉬웠을 지도 모른다. 독일과 영국에서 양질의 교육을 잘 받고 20여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기에 다양한 도시와 국가에서 지인 또는 주변인에게 비교적 수월하게 도움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50대의 독일 여성 언론인이라니 말 다했지 않은가(물론 이런 그녀의 배경보다는 그녀의 성격이 더 큰 몫을 했다는 걸 이미 알고있다). 나의 직업, 나의 경험과 커리어, 나의 네트워크는 그녀의 것과 비교하며 정말 볼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계속 들었다. 왜냐면, 이런 여행은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순수한 용기를 활용해 선택하고 결정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겁이 나는 일을 매일 조금씩 하라. 한 쇼핑백에 적힌 이 문구에서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용기도 근육운동이 필요하다. 작은 일에 자주 용기를 내다 보면 큰 용기를 내기가 쉬워진다. 나는 용기의 근육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당장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그날부터 찬물로 샤워를 한다.


사실 어쩌면 우리는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걸 할 수 있는 의지가 없어서 못하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가진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 비록 지금은 그게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 핑계로 우리 스스로를 안주하게 만드는 것들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피부를 가진 채로 낯선 것을 직접 보고 만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열두 도시를 여행하며 그녀는 열두 명의 친구와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책을 썼는데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게 그녀가 8월에 코펜하겐에 머물며 열다섯의 그녀 스스로에게 쓴 편지다. 오글거릴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리 오글거리지 않는다(그녀는 이미 내가 따라하고 싶은 언니, 그러니까 내 X언니같은 존재니까). 그리고 열다섯살의 마이케도 서른살의 나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가슴이 벅차오를 쫌 더 살아본 언니의 삶의 교훈들이 마구 쏟아지는게 바로 이 코펜하겐 편이다. (이 책은 안읽더라도 서점에서 코펜하겐 편만 읽어보라고 강요하고 싶을 정도다!)


더 친절하게 자신을 대해. 더 다정하게, 더 상냥하게, 더 관대하게. 실수를 할 때마다 '내 이럴 줄 알았어.'라며 비하하고, 성공을 할 때마다 '잘 되긴 했는데, 하지만...'이라며 자신을 의심하고, 툭하면 '바보 멍청이! 실패자!'라고 속으로 욕하지. 너는 다른 사람이 너를 정면으로 공격하면 그 사람과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려 하면서 네가 너에게 하는 나쁜 말은 고스란히 다 믿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마.


나의 가능성을 지레짐작해 안될거라고 애써 무시하고 기회를 날려버린 지난날의 내가 오버랩됐다.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에 게을리하고 특히 나쁘고 못난 것이라는 편견에 싸여있는 종류의 것은 더 외면하며 방치했던 나를 반성했다. 남의 허물은 쓰라리게 비난하면서 나의 허물은 덮고, 그러면서도 남이 나를 칭찬하고 인정할 때 전부 다 믿으려고 하지 않았던 나를 쓸쓸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용서했다. 



얼마 전에 TED를 하나 봤는데 60대의 수영인(말고는 적절한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여러번의 도전 끝에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쉬지 않고 수영으로 횡단하는데 성공했는데 그녀가 말미에 이런 말을 했었다. 


여러분이 꿈을 달성할 때, 당신이 무엇인가 얻는게 아니라 그것을 달성할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가 중요한겁니다.


요즘 이런 상상을 자주한다. 나는 무엇이 아닌 누구로 어떻게 늙고 싶은가. 사실 남들이 봤을 때 지금의 내가 나 혼자 생각하는 것 보다는 그렇게 후지진 않을거라곤 확신한다. 자신감 넘치고,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사람으로 아마 보이겠지(때로는 무섭고 사납기도 하지만). 내가 인정하든 안하든 남들이 보는 내 모습 또한 나라는 사실도 안다. 다만, '나는 원래 안 이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 사람들은 이렇다는데 나는 그런 것 같지 않아'하며 의기소침해있는 것보단 '아, 내가 이런 환경에서는 이렇게도 변하네. 내가 이런 사람들과 있으면 이런 모습이구나'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다. 말만 그런게 아니라 정말로. 그래서 내가 점점 어떤 사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정확히 보고 또 그 방향대로 더 잘 늙을 수 있도록 연습하고 노력하고 싶다. 그래서 우주 최고 섹시하고 우아하면서 멋진 할머니로 늙고싶다.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야. 넌 이미 그 무엇이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너는 지금 이 세상에 있는거야. 너 자신이 바로 너의 고유한 목적이야. 



생각보다 길이 너무 길어져서 놀랍다. 이렇게 길게 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브런치에 첫 글을 오늘밤에 꼭 쓰고 싶은데 할 말이 없으면 어떡하지? 생각했던 아까를 반성한다, 역시 나는 말이 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수준인 것이었다. 


나의 독일 언니가 책에서 추천한 TED가 한 편있다. Stefan Sagmeister라는 디자이너의 "The power of time off"라는 TED인데, 은퇴 후 평균 퇴직 기간인 15년의 1/3인 5년을 1년씩 떼어 일하는 중간 중간 안식년으로 삼자는 내용이다. 



안식년 동안에는 단순한 휴식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 하고 싶은 무언가를 더 잘해낼 수 있는 시간으로 정의하고 여유로움 속에서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면 더 크리에이티브하고 더 발전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단 경험적 '간증'이다. 이걸 읽고 또 하나의 다짐을 했다. 내가 대학 졸업 이후 일을 시작한지 꼭 7년을 채우면 나 역시도 1년의 안식년을 가지리, 그리고 한 달에 한 도시든, 세 달에 한 도시든, 여행을 하며 나의 모습을 발가벗겨버리리. 


사장님이 이 글을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러나 읽으시더라도, 나의 뜻을 헤아려주시리라 믿는다. (아직 2년 남았어요...)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큰 것, 가장 좋은 것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 거죠. 최상급을 찾느라 시간만 버리다가 결국 찾지 못해서는 안 돼요. 다른 곳에서 더 나은 것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당장의 기회를 놓쳐선 안 돼요. 


자, 그래. Carpe the hell out of this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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