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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Jun 24. 2016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해라!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무슨무슨-주의, 무슨무슨-론은 학교 다닐 때부터 늘 뒷꽁무늬를 졸졸졸 쫓아오면서 날 헷갈리게 했다. 졸업한지 수년이 흘러 지금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도는 큰 문제 없이 구분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최근 '새로운' 무슨무슨-주의가 나타나 또 다시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히고 있다.


개인주의,


예전처럼 정의가 헷갈려서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에서 그때 그때 내가 편한대로 이것 또는 저것을 취사 선택하며 살아온 나의 모순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다'라고 목소리를 내기 민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추구를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치로 두면서도 한국식 집단주의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때로는 권력 구조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그것을 수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일곤 했다. 이런 나를 관찰하던 누군가는 내게 '군대 스타일'이라 말한 적도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항상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딘가에 서서, 늘 양쪽에 발을 걸쳐 놓고 있었다. 노동자와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운동권 선배들을 흠모하면서도 누가 '너도 그럼 운동권이야?' 물으면 짐짓 쿨한 태도로 '아니, 난 운동권 아니야. 하지만 관심이 많지.'하고 대답하며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답을 하곤 했다. 회색분자, 뻔히 벼랑 끝일 저기까지 내 발로 가긴 두렵지만 뻔한 여기에만 머물러 있고 싶진 않았다. 발은 여기에 담그더라도 진보와 대안을 향해 서있고 싶었다. 그게 나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부끄럽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한국 사회의 극단적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쉽고 편한 것만 취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모순 덩어리였고, 여전히 그렇다. 


어쩌면 여기서도, 저기서도, 사랑받고 싶었던 발버둥이었는지도.




개인주의에서 시작한 글이 갑자기 무거워졌지만, 어쨌든 이런 성향과 배경을 가진 나로서는 <개인주의자 선언>이란 책은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는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식 집단주의에 반대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 문유석 판사가 쓴 굉장히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책인데 그가 비판하는 집단주의자의 양태가 내게서도 자주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큰 의미 없는 인연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한 학번이라도 위라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극존칭과 예우를 요구하며 군기를 잡는 시대착오적인 군대 문화가 대학사회에 만연하는 이유도 기성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를 흉내내고 서열주의를 내면화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이 아니라 소속 학교, 학과, 학번 등의 집단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위계질서에 개인이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문화가 젊은 세대에서까지 재생산되고 있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다."


한때 88만원세대로 불리웠던 80년대생인 우리 세대는 아마 집단주의적 성격이 가장 강한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금융위기 때는 이 집 부모님은 평생 직장에서 정리해고되고, 저 집은 돌반지까지 내다 팔 정도로 나라 경제 살리기에 여념이 없는 부모님을 보며 사춘기를 맞이했고, 붉은 옷을 입지 않고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매국노나 다름 없는 분위기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보수나 진보나, 우리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기 위해 개인보다는 집단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렇게 충실히도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살던 우리가 사회로 나와 이제 좀 '먹고 살아보려고' 하니 저성장시대가 도래했다. 경제적 자본의 양극화에 기인한 사회적 자본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는 강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졌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들과의 구분하는 것으로 존재 가치를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낙오에 대한 공포, 격차에 따른 박탈감과 초조함, 파벌, 강박적 인정투쟁 뭐 이런 것들을 자의반 타의반 만들어내며 악순환을 반복했다. 


이런 사회에서 웬 개인주의냐 묻는다면, 이런 강박적 집단주의가 더 이상 안정적인 소속이나 지위, 지속적인 행복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도 조금씩 깨닫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10년에서 20년 앞섰다고 평가되는 일본의 경우, 현재의 2~30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가장 현재 삶에 대한 만족감이 높은 세대라고 한다. 어차피 미래는 불투명하니, 기존의 아버지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안정된 미래를 위해 소속된 조직과 집단에 헌신하는 것으로 적금을 드는 삶은 살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이자율은 0%나 다름 없으니, 현재에 쾌락에 투자하는 편이 남는 장사라는 판단에서다. 우리도 점차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특정 집단이나 조직이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기에, 더 이상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된 '한방'에 목숨걸지 않고, 지금에 충실하며 사는 것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면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이상한 삶을 살고있는 우리들에겐 일단 꼬박꼬박 칼퇴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 같다.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위의 텍스트처럼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가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쾌락만 주구장창 즐기거나 타인에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서로 존중하는 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사회를 신뢰하는 성숙한 태도를 말한다. 그릇된 방식으로 나와 나를 둘러싼 우리를 정의하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경계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합리적인 태도.


'아-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집단주의 문화가 더 심해지면 안되겠구나'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는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한 집단주의 문화의 사회다. 나서는 걸 죄악시하고 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가 뭘 잘했을 때의 칭찬보다 그가 뭐 한 가지 잘못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달려들어 돌팔매질하는 광기가 훨씬 뜨겁다. 당연히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면 책임을 맡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진보와 성장을 위한 리스크 테이킹이 적어진다. '사회를 바꾸려면 도덕적인 것만으로 부족하고 유능해야 한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했는지 모른다. 유능하려면 자주 실수하고 많이 실패해봐야하는데 우리는 이것들에 너무 취약하다,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이제는 책임을 지려는 사람에게 평가와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그 자체로 격려하고 응원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그 중심에, 개인주의가 있다.




아침마다 시간대별 온도나 미세먼지 농도 같은 걸 확인하기 위해 포털에 들어간다. 화면에 들어오는 8~10개의 기사 중에 절반 이상이 누가 누구를 죽이고, 지구 반대편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명예로워야 할 사람들이 죄를 저지른 소식들이다. 한 번도 이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지만 너도 나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쓸법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민을 가든, 눈과 귀를 닫고 살고 싶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히 좋은 것도 완벽히 나쁜 것도 없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 밖에 결정할 수 없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 나왔던 대사처럼 "Life can be a comedy or a tragedy, it all depends on how you look at it." 그렇다면 더 나은 면을 보는게 낫지 않을까? 절망으로 세상을 보며 비관하느니, 희망을 가지고 아주 작게라도 바꿀 것들을 찾는게 더 나으니.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Anyone can be cynical. Dare to be an optimist.




평소에 별로 심각하거나 진지한 글은 거의 쓰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가 자기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다보니 내용이 다소 무거워졌다. 글을 발행하는게 부담스럽기도 해서 묵혀뒀다가 철학자 김상봉의 인터뷰를 읽고 생각이 뀌었다. 


개인이 주체로서 한 번도 교육받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는다.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만큼 경악할 만한 일이다. 막상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살려고 발버둥친다. 그 아우성이 ‘강남역 사건’이다. (중략) 함석헌은 말했다. 선과 악은 언제나 집단적으로 나타난다고. 홀로주체의 선악이라는 건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만 있는 거다. 현실에서 선악은 언제나 서로주체다. 주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처해 있는 악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바꾸려 하지 않고 ‘내가 무슨 힘이 있어?’라고 말한다. (source)


이 글을 읽고 '이 망할 집단주의적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개인주의자로서 자유롭게 연대하며 더 나은 존재이자 사회로의 진보를 추구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물이 뜨거워지는 것도 모르다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기보단 냄비를 엎고 물을 갈아버리는 담대한 개구리를 택하겠다. 싫으면 싫다고, 후지면 후지다고, 말하자, 그게 진실이고 최선인걸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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