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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Aug 06. 2016

공부만이 정답이라고 믿는 공부 중독자들에게

<공부중독> 엄기호, 하지현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짝짝짝. 서커스 보고 박수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나는 책과 사람 사이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좋은 책이더라도 그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에너지를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땐, 즉 둘 사이에 궁합이 잘 맞는 타이밍이 아닐 땐 책이 가진 가치의 백만분의 일도 발휘하기 어렵다. 실제 내게 그런 책이 몇 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그랬고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도 그랬다. 지금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이자 작가지만, 처음 읽었을 땐 내가 너무 어려서(상실의 시대를 중3땐가 고1때 읽었으니... 그건 내가 잘못했다) 무슨 의미인지 하나도 이해못하고 그저 텍스트만 눈으로 훑는 수준이었달까? 


엄기호 교수와 하지현 교수의 대담을 책으로 만든 <공부중독>도 지난해 서점에 깔리자마자 발견하곤 '우왓!'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훑어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왠지 내키질 않았다. 그러다 며칠전 같은 서점에 들렀다가 서가에 꽂힌 책을 발견하고 평소처럼 표지 뒷장을 먼저 훑고 서문을 읽었다. 서문을 다 읽지도 않고 바로 계산대로 갔다. 지금이 그 타이밍이었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성실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 그 완벽한 타이밍.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우리는 '공부'란 단어를 언제부터 썼을까? 보통 말을 떼면서부터 숫자를 배우니까 네다섯살? '공부'란 단어를 지금껏 얼마나 많이 썼을까? 초중고 12년간 매일 하루에 한번 썼다고 가정하면 4천번, 요즘은 평생 공부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니 20년으로 계산하면 7천번, 적어도 1만번은 족히 썼으려나? 


엄기호 교수는 공부를 이렇게 정의한다,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 즉, 삶을 해석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지는 것이고, 기존의 언어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부는 더 이상 삶을 해방시키는 망치가 아니라 계획된 프레임 안에 가두는 몽둥이가 됐다. 그는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를 하면 언어를 배우게 된다.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가 늘어나는 것이 공부의 과정이다. 예를 들면 '구조'라는 말을 알 때와 그러지 못할 때 세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획기적으로 달라진다. 공부는 사실 이렇듯이 세상을 읽고 삶을 해석하는 언어라는 좋은 도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미 권력화한 지식에 포획되지 않은 '삶'을 포착하려는 것이었고 그 삶이 지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공부였다. 그랬기에 공부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삶이 공부에 의해 식민화된 즉 '공부중독'이 된 예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단,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인터넷에 검색을 하고 검색해도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전문가의 강의를 찾는다. 직접 해보거나 스스로 답을 찾으려는 대신 답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정답을 듣고 수집한다. 이 해결방법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걸 직접 경험할 수는 없기에 간접 경험도 그만큼 중요하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면면에 공부를 적용하는게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영원한 대기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마무리 짓고 무대 위에 오르든 시험대에 오르든 타석에 서든 결판을 지어야 하는데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예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공부를 하는 아니 '한다고 하는' 누군가에게 공부를 하지 말라거나 공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공부는 늘 선한 것이고 존중받아야 하는 고귀한 것이니까. 




이런 공부중독 현상이 왜 그리고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다양할 수 있겠지만 저자들이 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 공부로 입신양명이 가능했던 마지막 시대 즉, 개천에서 용나던 시절에 용이 되었던 청년들이 부모가 되어 자신들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소위 '사자'로 끝나는 전문직이 되는 길을 배우고 경험했던대로 전수하고 있다. 대치동이라는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자기들만의 리그를 치르며 시스템화된 공부와 경제적 지원이라는 두 날개를 달고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수성하고 있다. 그 사이 순진한 99%의 부모들은 그 길이 유일한 길인줄 알고 학원 뺑뺑이를 돌리며 '공부만이 살길이다'라고 아이들을 학원차에서 밥을 떼우고 쪽잠을 자게 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공부 하나 잘해서 윗층으로 점프하기엔 피라미드 꼭대기층 천장이 너무 묵직하다. 물론 이마저도 여유가 없으면 따라할 수도 없지만. 


둘. 위계화되고 학벌화된 시스템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자격증만이 학생들이 유일하게 추구하는 대상이자 목표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대안은 제공되지 않는다, 익히는 과정 없이 배우고 또 배우고 또 배우기만 한다. 남보다 더 빨리가려면 중요하지 않은 것을 돌볼 여유나 우회는 가당치도 않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최적화'한다. 가장 빨리 가는 길,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찾게 되면서 삶도 매뉴얼화된다. 엄기호 교수의 말대로 "사람의 성장은 낯선 것, 타자와의 부딪힘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의외성과 낯섦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매뉴얼 밖에 것들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예측 불가능으로 가득하다. 매뉴얼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중대한 것까지 삶의 문제들은 매뉴얼로 해결할 수 없다.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 지혜로 가능한 것을 책에서, 전문가의 강의에서 찾아봤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도로묵이 된다.


셋. 앞서 언급한대로 삶의 많은 영역 아니, 거의 모든 것이 학교화(스쿨링)되는 현상이 최근들어 무척 심각해졌다. 세상에는 배울 수는 있지만 가르칠 수는 없는 것도 있는데, 모든 것이 가르치는 대상이 된 사회랄까. 모순인 것은 이 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들 가령, 매뉴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의 과정에서 터득할 수 있는 지혜의 가치는 반대로 무가치해진다. 


현재의 우리 교육에는 빨리 배우는 경주만 존재할뿐, 익히는 경험은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이 지속되면 관계와 상호작용에서 성숙하는 배움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만들고 키우고 유지하는 근육이 쇠퇴하게 된다. 쉽고 빠르게 배우는 최적화에 익숙해지면서 Risk Taking을 하지 않는다, 실패를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작은 실수 내지는 실패에 심각하게 취약해진다. 교육 현장에는 더 이상 지혜를 전수하는 스승은 필요치 않고 계약에 의한 지식 전달자만 필요하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몰이해가 더 심화시키고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진 세대간 갈등과 혐오를 악화시킬 단초가 될 수 있다. 가장 무서운건 이런 그릇된 시스템과 정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린 그에 굉장히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조금씩 더 뜨거워지는 냄비 안에 있는 개구리가 우리가 아닐까?




나 역시도 앞서 말한 빨리 배우는 것에 익숙하지, 속도가 나지 않으면 불안한 공부 중독자 중 하나다. 그러나 결국은 그게 내 발목을 잡을 거란 걸 안다. 냄비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나. 혼자서 깨닫을 시간을 절대적으로 늘리는 것. 엄청난 깨달음이 꼭 아니더라도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게 필요하다. 정답은 늘 나의 내면에 있으니까.

둘. 삶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삶은 절대 1차방정식이 될 수 없다, 변수에 따라 해가 천차만별인 고차방정식이다. 그러니 나의 삶도 타인의 삶도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자, 그리고 되도록이면 삶의 변수를 늘려보자. 

셋. 정답이 아닌 의견을 갖자. 우리 나라 사람들이 토론에 취약한 이유 중 하나가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때문인데 전능감 실현의 욕망이 실패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낳는다.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자. 같은 어젠다에 70억개의 의견이 있음을 늘 상기하자.


이 책은 현상에 대한 해석과 논리적인 비판은 하지만 그럴싸한 솔루션을 제안하지 않는다. 사실상 오랜시간 우리 사회가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이기 때문에(물론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만) 해결 방법이라는게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 


유시민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큰 강이 흐르면, 이곳저곳에서 물이 들어오고, 흙탕물도 들어오죠. 중요한 건 큰 강이 어디로 흐르느냐, 바른 길로 흐르고자 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공부에 중독된 또는 불안을 소비하는 우리 개개인이, 교육 현장의 교육자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의사결정자들이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노를 저어가면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방향으로 물살이 바뀌지 않을까? 대책없는 바램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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