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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Jul 25. 2016

심플하게 도배의 달인 되기

<심플하게 산다> 도미니크 로로

집은 '언젠가는 쓰일'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 요지부동의 창고가 아니라, 꼭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심플하게 산다> 도미니크 로로 (사진 출처: THANKSBOOKS)


지난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사흘 주말을 꽉 채워 이사를 했다. 이사한 곳은 내 방에서 겨우 5보(步)거리인 건넛방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다섯 걸음 거리를 넘어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기억에 남는 장면 몇 가지.


Scene #1

첫날 10년 넘게 쓴 책상과 침대를 모두 재활용센터를 통해 처분하고, 이고 지고 살던 책 중에서 두 번은 안 읽을 책들만 추려 알라딘과 고물상에 처분했다. 책을 판 돈으로 아침부터 고생한 아빠에게 냉면 한 그릇을 대접하고, 저녁엔 엄빠에게 장어를 쐈다. 책을 팔아 효도(?)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Scene #2

대망의 셀프 도배+장판의 날. 겨우 5평이 될까 말까한 방 한칸의 벽 4면을 도배 하는데 무려 6시간이 걸렸다. 물론 처음인데다 혼자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렵진 않지만 쉽지도 않은' 일이 도배였다. 풀이 마를까봐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못키고 하느라 땀은 억수로 내리고 온 몸에 풀칠한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있자니 '허허' 웃음만 나왔다.


도배의 꽃이자 끝, 천장 도배는 친구가 와서 도와줬는데 6시간 연습했다고 친구는 나한테서 '업자'의 향기가 난다고 했다. 끝을 고정시켜놓고 민자(도배할때 쓰는 주걱)로 촥-촥- 밀 때 그 쾌감이란! 아빠도 천장 다 마른 것 보고 이참에 전직하라고 할 정도. 후훗.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배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잘 하는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시간과 반복이란 선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잘 할 순 없는 일 그거슨 도배


Scene #3

엄마와 아빠는 지난 사흘간 '머리를 북쪽에 두고 자는 게 아니다', '장판의 방향은 문쪽으로 해서 쓸기 좋게 깔아야 한다' 등등 온갖 풍수지리와 미신을 배경으로 한 훈수와 잔소리를 끊임없이 했다. 듣기 싫다고 징징,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발끈했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혜로 가득한 '인생의 현자'가 진짜 어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Scene #4

가구를 옮기고, 도배와 장판을 새로 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리와 청소들. 사흘간 못해도 20시간은 넘게 노동(!)을 한 것 같다. 도배할 때 하도 만세를 해서 어깨가 아프고 4층에서 1층까지 계단으로 가구를 옮기느라 안쓰던 근육들이 흥분을 한 상태라 아직도 여기저기가 욱신거린다.


엄마는 차라리 돈을 쓰는게 낫지 않았겠냐고 물었다. (엄마, 도배지랑 장판이랑 새 가구는 돈이 안든게 아니여. 다 내 돈 주고 산거여.) 근데 해보니까 알겠더라,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셀프 인테리어에 목숨거는지. 할 땐 힘든데, 하고 나니 이게 엄청난 보람과 흐뭇함을 몰고 온다. 아버지, 정녕 이 벽지를 제가 바른 것입니까!!!



사실 이번에 방을 바꾸고 불필요한 짐을 모두 처분한 건 좀 더 널찍한 방을 쓰고 싶어서도 있지만 공간을 바꾸고 또 비워야 생활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였다. '자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으로 바꾸고 싶었다.


내가 얻은 확신은 적게 소유할수록 더 자유롭고 더 많이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간소하게 살려고 보니 부족한 것도 많지만 이만하면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제 자기 전에 침대 위에 누워 든 생각인데, 나에게 필요한 건 오직 스탠드 하나, 책이나 랩탑, 그리고 한 잔 가득 채워진 물컵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책과 물건이 쌓여있는 방 한 구석


오늘부터 하루에 하나씩 물건을 버리는 연습을 해야지. 버리다 보면 더 풍성하게 채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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