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고백엔 대답이 없다
1.
할머니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물건 또는 순간들이 몇가지 있다.
이를테면 머리를 감고 나와 참빗으로 머리를 곱게 빗어 묶고 쇠로 된 짧은 비녀를 꼽던 매우 신중한 손길, 손바닥보다 작은 검정색 지갑에 들은 천원짜리부터 동전까지 하나하나 읖조리며 셈을 하던 소리, 밭에서 상추를 따다가 시장에 내다파느라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던 손톱 아래 검은 흙자국.
2.
나는 할머니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한 방을 썼는데 할머니는 내가 스무살이 될 무렵부터 치매에 걸리셨다. 그땐 치매인 줄 몰랐다. 새벽에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깨서 가만히 들어보면 '내 돈 가져간 나쁜년'이라며 나를 욕하는 소리였고, 장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자꾸만 새벽에 밭에 나가겠다며 문을 여는 통에 아빠는 밤마다 할머니가 못나가게 지키느라 거실에서 잠을 자기 시작해 급기야는 밖에서 잠그는 걸쇠를 현관에 달기까지 했다.
나는 할머니를 미워했다. 어렸을땐 늘 나보다 오빠를 예뻐하는게 서러웠고, 사춘기땐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에 늘 할머니가 끼어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고, 이후엔 치매에 걸려 내게 욕하고 식구들을 괴롭히는게 미웠다.
3.
남원의 작은 시골 마을 인월시장에서 팔순이 넘어서도 시장에 나와 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여전히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셨다, 치매에 걸리기 전 우리 할머니처럼.
백원 하나 허투루 안쓸, 강한 생활력이 얼굴에 가득한 주름으로 표현됐다. 그리고 손톱 아래 검은 흙자국.
오늘 이거 다 팔고 다음 장에 또 나올거라던, 죽기 전까진 장사할거라던, 인월시장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우리 할머니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평생을 허리굽어가며 장사해서 돈을 벌던 할머니, 그 돈은 능력없는 아들들이 야금야금 가져가버리고 껍데기밖에 안남은 얼굴을 하곤 멍하니 앉아있던 할머니의 표정, 그리고 잘라낸 긴 머리카락.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여자로서의 그녀의 일생이 다가오던 순간이었다.
4.
할머니에게 장사는 무엇이었을까.
할머니에게 돈은 무엇이었을까.
할머니에게 자식들은 무엇이었을까.
5.
초등학교 때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장사를 마치고 들어온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쳤었다. 딸 자식에겐 글도 안가르치던 일제시대에 함평 촌구석에서 태어난 할머니였다.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다음날이면 또 까먹었다. 어린 마음에 답답해서 할머니는 왜 이것도 기억 못하냐고 면박을 주었던 게 기억난다. 할머니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당신이 못나서 그런거라며 긁적였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는 한글을 안배워도 된다고 너나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내가 그때 짜증내지 않고 끝까지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쳤더라면, 우리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지 않았을까? 숫자 말고 글자를 읽을 줄 알게되면 할머니의 삶은 덜 팍팍해지지 않았을까?
6.
인월의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사를 하셨으면 좋겠다. 우리 할머니가 장사를 좋아했는지 억지로 했는지는 이제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시장에 앉아 "오늘 상추 참 좋아요" 하던 할머니의 얼굴은 분명 생기로 가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