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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집가 Nov 18. 2016

함께 그리고 싶은 우리의 미래

<사피엔스의 미래> 알랭 드 보통, 말콤 글래드웰, 스티븐 핑커 외


무려 20년만에 알랭 드 보통이 쓴 '소설'이 나왔다며 지인이 피를 토하며 추천하기에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알랭 드 보통을 검색했다. 최신순으로 검색해보니 지인이 말한 그 책인 것 같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리스트에 가장 위에 올라있었고, 그 아래 소설의 제목으로는 비교적 적합하지 않은(공상과학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면 모를까) 책이 한권 따라왔다. '유발 하라리의 후광을 염두에 둔 제목같은데?' 하면서 클릭, 그리고는 곧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솔직히 말해서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는 누군지 몰랐...



사피엔스의 미래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일년에 두번, 봄과 가을에 열리는 토론회, 멍크디베이트(링크)가 지난해 11월에 주제로 했던 '진보 : 인류의 앞날에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에 대한 토론을 엮은 책이다.



멍크디베이트가 특별한 이유 #1 내로라하는 지성인의 토론장이자 혈투가 벌어지는 경기장


멍크디베이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특정한 주제 내지는 질문을 두고 우리 시대의 지성인이자 해당 분야의 권위자들이 2인 1조로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약 2시간의 토론 '배틀'을 벌인다. 3천여명의 유료 관객이 자리한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른 찬성과 반대팀이 각각 찬반론을 개진한 뒤 모더레이터의 진행에 따라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지며 격렬한 토론이 이어진다.


여기서 말한 격렬하다고 표현은 모든 의미에서의 격렬함이다. 토론자들은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과도하게 비꼬면서, 말그대로 극렬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왜 이 주제에 대해 찬성 또는 반대할 수 밖에 없는지 논리적 주장과 감성적 터칭,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렇게 격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단언컨대, 토론에서 승리하기 위함일거다. 멍크디베이트의 룰 중 하나가 참석이 확정된 참가자에게 사전 찬반 투표를 진행하는 것인데 찬반 뿐만 아니라 한가지를 더 묻는다, '현재 너의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이 토론 후에 바뀔 수도 있을까?' 어쩌면 이게 핵심일 수 있는 것이 토론이 모두 끝난 다음, 다시 찬반 투표를 진행했을 때 청중의 의견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또 실제 의견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한 예컨대, 중도성향의 청중들이 토론 이후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에 따라 주제와 관계없이 찬성과 반대 각 팀의 토론자들이 얼마나 의미있는 토론을 했느냐가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에 토론자들이 아주 격렬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토론을 논평한 앨리 와인은 "이번 토론의 핵심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다. 진보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추론 과정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첫번째는 말할 것도 없고, 두번째는 청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핵심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책을 옮긴 전병근 북클럽 오리진 대표 또한 "멍크 디베이트의 초점은 찬반 두 팀 중 어느 편이 ‘객관적으로 옳은 답을 말했느냐’가 아니다. 방청객이 보기에 ‘누가 더 설득력 있게 의견을 펼쳤느냐’가 중요하다. 멍크 디베이트가 추구하는 목표가 진리나 진실의 탐구가 아니라 설득과 합의의 도출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가 절대적 진리가 아닌 합의된 의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원문 링크)"고 말했다.


토론이 진행되는 캐나다 토론토의 로이톰슨홀 (출처 https://www.munkdebates.com/debates/Progress)



멍크디베이트가 특별한 이유 #2 권위는 잠시 내려두고,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


'사피엔스의 미래'에서 다룬 인류의 진보에 대한 토론의 경우 찬성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지과학자 중 한명인 스티븐 핑커와 영국의 대중 과학 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가 자리했고, 반대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알랭 드 보통과 아웃라이어로 유명한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이 맡았다.


하지만 앞선 토론에서도 각 분야의 저명한 권위자들이 토론에 나선 것이 눈에 띈다. '종교가 세계에 '선(good)'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한 토론에는 토니 블레어 前 영국 총리가 찬성을 맡아 토론했고, '미국과 캐나다 경제가 일본처럼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에 직면했는가?'라는 주제에는 찬성에 폴 크루그먼이, 반대에는 로렌 서머스가 나와 경제학계에서는 꽤 빅매치로 회자된다. 이외에도 기후변화, 중국의 부상, 젠더 불평등, 난민 문제, 불법적 감시 이슈 등 폭넓은 주제를 다뤄왔다.


권위자 또는 유명인이 나와서 특별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삶과 사회의 근간이 되는 다양한 이슈들을 무대 위로 끄집어내서 서로 다른 논리적 근거와 주장을 열심히 펼쳐보이게 함으로써 청중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좀 더 탄탄히 또른 다른 관점에서 다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아인슈타인은 '권위에 대한 생각 없는 존경심이 진실의 가장 큰 적'이라고 말했는데 물론, 폴 크루그먼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토론자의 하나이자,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의 하나로 그를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지적 활동 내지 성장을 권위자의 말과 글에 너무 많이 종속시키던 경향에서 아주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충분히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멍크디베이트가 특별한 이유 #3 누구나 접근가능한 지식 컨텐츠로


멍크디베이트는 캐나다의 금광 재벌인 피터 멍크가 설립한 캐나다 오리아재단이 2008년부터 열어왔는데 정말로 아주 멋지게도 지식의 오픈소스화(?)에 기여하고 있다. 멍크디베이트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각 주제별 토론의 풀영상은 물론, 토론의 전체 내용(Script)과 사전 인터뷰 등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한다.


멍크디베이트 공식 홈페이지에서 이번 토론의 별도 페이지. 기존 토론의 영상과 스크립트 모두를 회원가입만 하면 무료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공식 언어인 영어를 읽고 듣는게 자유롭다면 굳이 책을 사서 읽을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웹페이지에 있다. 이 오픈소스화된 컨텐츠들은 목적과 의지에 따라 다각도로 활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폭넓은 사고를 위한 토론의 교보재로 활용하기 그만이다.


이렇게 무료 컨텐츠로 제공됨에도 불구하고 왜 적게는 30달러에서 많게는 100달러 가까이 내면서 현장에 갈까?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중요한 현안에 대해 시민의 한사람으로써 찬성 혹은 반대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토론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게함으로써 지식의 생산과 확산에 기여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이번 토론의 결과를 살펴보자. 사전 투표의 경우, '인류의 앞날은 더 밝을 것이다'라는 찬성은 71%, 반대는 29%였다. 토론이 끝나고 최종 결과는 찬성 73%, 반대 27%로 여전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청중이 많았던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토론의 내용을 보건대, 찬성측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과학과 문명의 발전에 힘입어 평화, 보건, 번영의 영역에서 분명한(=데이터로 증명되는) 근거를 보여왔고, 앞으로도 이런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주로 이야기했다. 이에 반해 반대측은 모든 현상은 단편적이지 않으며 번영의 결과가 가져올 반대급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찰해본다면 과연 모든 것이 진보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찬성측은 수치와 통계로 토론을 계속 이어갔던 반면 반대측은 숫자만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철학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책을 처음 폈을 때와는 반대로 알랭 드 보통의 주장이 가장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가 시니컬한 화법의 대가라는 건 이미 알고있었지만 꽤나 다혈질이라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고. 모순되게도 그의 주장에 가장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그에 말에 가장 많이 무릎을 쳤다. 가령, 이런 말들.


저는 역사 속에서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사회운동의 다수가 완벽주의를 신봉한 사람들한테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단번에 영구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과학자와 정치인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던 생각은 터무니없이 위험한 인생 철학입니다. 우리 중에서 완벽주의자들이야말로 세상을 너무나 자주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종종 그보다는 훨씬 더 겸손한 사람들의 업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결함을 물론 타인의 결함까지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지상에서 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비관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류의 진보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진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어두운 사실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아주 면밀히 주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처럼 반진보론을 펴는 사람들과, 일종의 암울함과 낙담에 빠진 사람들과는 구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낙담론자가 아닙니다. 유쾌한 현실론자들입니다.


보통이 아닌 보통 오빠...라고 하면 너무 아재개그인가?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토론이 가능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가능성의 여부를 넘어 '필요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 토양의 강화를 위해서라도 지식 컨텐츠를 생산하고 공유하는 활동은 다양한 방식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멍크디베이트 모델의 토론의 장을 열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토론을 가능하게 할 토론자와 모더레이터도 없고 돈도 없지만 씨앗을 심고 땅을 일구다 보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 하나는 분명히 있다. 꼭 이런 몇천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토론과 결과물 공유가 아니더라도 양적, 질적 지식 컨텐츠를 생산해낼 수 있는 소모임들을 열어볼 수도 있다. 매뉴얼화된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나 토론을 하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배움과 앎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게 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고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속사회> 엄기호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지만 스스로 깨닫고 익힐 수 있는 자기만의 삶의 도구를 제련하는 커뮤니티.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에게 참조점(Reference)이 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고 남의 이야기를 또 그렇게 들으면서 상호 성장하는 커뮤니티.

지식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유하는 커뮤니티.

우리 모두가 가진 잠재력과 새로움을 마음껏 발견하는 커뮤니티.


아직은 파란 하늘 아래 들판만 덩그라니 놓여있는 인상파 화가가 그린 그림같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머리를 맞대면 들판 위에 지은 집도 그리고 그 안에서 풍요롭게 살아갈 사람도 있는, 마치 세잔의 그림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저와 이 커뮤니티에 함께 하고 싶은 사람, 어디 없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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