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할리님 긴장하세요, 브랜뉴 로버트의 등장!
“… to become a truly international person, you should live in three countries and learn three languages and this way you give your life balance, and a deeper meaning, instead of ‘Us and them.’ This has served me well, because truly a lot of people get into an ‘Us and them’ conundrum. It’s given me another viewpoint that I never would have had if I hadn’t lived in a third country and learned another language.” Judith Clancy (source)
소나기가 쏟아지던 토요일 오후, 40여명의 한국인이 '파란눈의 미국인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도 모자라 유머러스까지 하기한 기이한(?) 광경'을 입을 벌린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하는 외국인으로, 외국인 최초 서울대 교수로, 한국어를 포함해 8개국어를 하는 언어학자로 이름이 난 로버트 파우저 교수의 <미래 시민의 조건>이라는 강연 현장이었다.
위에 작은 따옴표 안에 적힌 내용은 사실 편협하기 그지 없는 서술이다. 파란눈의 미국인이라고 했지만 나는 교수님의 눈동자가 파란색인지 옅은 녹색인지 회색인지 알지 못하고, 그의 국적은 미국이 맞지만 그의 아이덴티티를 국적 하나로 제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종종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을 볼 때마다 신기해하고 가슴 벅찬 뿌듯함이 몰려오는 걸 느끼면서도 한국인이 더듬더듬 영어로 말할 때면 발음이 어떻느니 문법이 잘못됐다느니 평가하기 바쁘고, 반대로 유창하게 말하면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우린 언제부턴가 미국인과 영어에 대해 떠올릴 때면 편견과 부러움과 두려움과 시기심이 마구 섞인 복잡미묘한 감정을 갖게돼버렸다. (Do you know PSY? Do you like Bibimbob?)
"나는 고등학교 때 언어에 흥미를 느껴 대학 전공을 일본어로 하게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또 고등학교 때는 스페인어를 대학원 때는 라틴어를 공부했다. 그 외에도 독일어, 한문, 프랑스어, 중국어 그리고 몽골어는 취미처럼 공부했다. 왜 그렇게 언어를 좋아했을까? 다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모국어 하나로 사는 것이 흑백이라면, 두 가지 언어를 사는 것은 컬러이고 언어 세 개 이상으로 사는 것은 3D컬러이다." <미래 시민의 조건> 중에서, 로버트 파우저
이날 파우저 교수님의 강연은 제3의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를 가져다주는지, 이를 위해 언어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교수님은 온전한 언어 학습을 위해서는 3가지에 대한 배움, 호기심, 실천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건 바로 이렇다.
첫째, 언어구조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가장 많이 드는 연말연시에 대형서점 외국어 코너에 가보면 제일 눈에 띄는게 회화 패턴을 모아놓은 책이고 그 다음이 아마 문법책일거다. 우리집에도 영어 문법과 회화 책이 몇권이나 있는지 모른다, 그 중에서 완벽하게 끝낸(?) 책은 한권도 없지만.
특히 문법책은 성문 > 롱맨 > 그래머유즈드를 거치며 학생과 직장인을 막론하고 늘 스테디셀러였고 우리는 한국인의 영어 말하기를 들을때마다 저게 왜 문법적으로 틀린 말인지만 꼬치꼬치 따지기 바쁘다. 또 발음이 어떻네 저떻네하며 우리보다 비교적 발음이 부정확한 다른 아시아인의 발음을 폄하하기도 한다.
우리는 안다, 발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반기문식 영어 발음도 국제사회에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만일 네이티브 특히, 뉴욕이나 토론토같은 이민자가 많은 도시에 사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우리의 부정확한 발음을 못알아 듣는다면 그건 듣는 사람의 국어(영어) 실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법은? 문법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외국인과 대화할 수록 문법보다 중요한건 뉘앙스와 표정, 바디 랭귀지라는 사실을 느낀다. 언어구조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국인은 언어구조 학습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둘째, 언어문화
파우저 교수님은 사회적 측면의 언어문화를 외국어를 공부할 때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말을 예로 들면 반말-존대말같은 기본적인 것에서 부터 -해요체와 -합니다체, -합쇼체 등 어미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대로 영어의 경우에는 "No의 88가지의 의미"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목소리, 톤, 억양 등 뉘앙스가 무척 중요하단다.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의 특성에 맞춰 제2외국어, 제3외국어를 할 경우 상대방이 경험하게 되는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셨다.
셋째, 언어생활
외국어 공부를 할 때 우리는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문법도 달달달- 패턴도 달달달- 외울 뿐, 언어 그 자체를 내것으로 소화해내지는 못한다.
즉, '한국어로 말하는 나'는 31세의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이지만, '영어로 말하는 나'는 킨더가든에 다니는 여섯살 꼬마 남자애가 될 때가 있다. 나의 아이덴티티에 맞는 적절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
언어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어휘부터 발음, 톤, 억양, 패턴까지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한국인이 외국어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파우저 교수님은 하나, 언어구조에만 집중하고 둘, 언어문화에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며 셋, 언어생활이 부족한 것 때문이라고 말했다. 80년대 초반, 서울에 처음 온 파우저 교수님은 한국어를 잘 '말'하기 위해 a. 기존에 배웠던 일본어를 활용하고(어순이 비슷하고 한자어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b. 문법, 발음을 열심히 공부하고(어랏! 이건 우리와 같네) c. 집중적으로 한국 사람과 소통할 기회를 만들고 d. 서울시 답사를 정말 많이 다녔다고 한다.
'안전한 길로만 다니면 쓸 수 있는 단어가 줄어든다'며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고 열심히 길을 잃어버리셨다고 한다. 언어를 쓸 기회를 자주 만들지 않으면 뉴욕에 30년 살아도 영어를 한마디 못하는 한인타운 갈비집 사장님처럼 될 수 있다며, 일상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흑백 영화를 컬러로, 3D로 만들 기회를 많이 만들라며.
교수님의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이어졌는데, 아- 어찌나 명쾌하던지! 로버트 할리급으로 한국어를 잘하는 아저씨일 뿐만 아니라, 언어학자가 맞았다!
Q. 이탈리아어를 일때문에 잘 해야만 하게 됐는데, 압박감이 심해요.
A. 취미생활과 연결하세요. 요리를 배우던지, 미술사를 공부하던지.
Q. 20~30대에 맞는 외국어 공부법이 있을까요?
A. 10대처럼 공부가 일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Language Maintanance가 더 중요해요. 고등학생때처럼 주구장창 공부하는 것 보다는 매일 조금이라도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에요.
Q. 성취감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A.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쭉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 실력을 끌어올린다? 그냥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아주 작은 성취와 성공에 집중하세요. 어제까지 결과주의자였다면 오늘부터는 과정주의자가 되세요.
Q. 일 때문에 외국인과 마주칠 일이 많은데 읽고 듣는 수준은 높은데 말하는 수준이 떨어져서 걱정이에요.
A. 말하는 내용 즉, 일에 대해 흥미를 느껴야 말하는 수준이 올라가요. 지금 하는 일, 흥미가 있는 일이 맞나요?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한 여고생의 질문이 흥미로웠다. 영국의 친구들은 '너 한국인이잖아' 하더니, 한국의 친구들은 '너 영국인이잖아'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아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고 했다. 그러자 파우저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인이 맞아요. 국민으로서는 분명 미국인이지만 글쎄요,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미국 시민일까요? 나는 그냥 나에요. 국적은 국적일 뿐, 내가 미국 또는 한국을 대변할 필요는 없잖아요?"
글로벌이고 뭐고, 그냥 언어는 나의 가능성을, 나의 세계를 한층 더 넓혀주는 도구이자 좋은 친구다. 나로써 온전한 나를 더 잘 표현하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할 수 있는 언어, 오늘 그 친구를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