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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xploring myself Sep 15. 2021

나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나를 발견해내는 것에 관하여


위의 물음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고 안정된 일상을 떠나 충동적으로 포르투갈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이 짧은 문장은 그레고리우스가 일탈행위를 하는 발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큰 충격 비스무리한 것을 주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기 시작했을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이러저러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제 자신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진행형이예요). 저는 저를 감싸고 있는 여러가지 외부적인 수식어들을 떼어놓은 상태에서 과연 저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정의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그렇지만 저조차도 저 스스로에 대한 정리를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괴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 여러가지의 모습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들은 끊임없이 삶 속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곤 하지요.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나’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순간 놀라움보다는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는 누구나 자기자신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자신보다는 더 나은, 자신이 그리는 바에 가까운 어떠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거지요. 하지만 자신의 이상에서 거리가 있는,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 자괴감을 느끼곤 합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그렇지만 파스칼 메르시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의 과잉’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를 ‘나’는 어찌 보면 하나가 아닌 가지각색의 자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미 ‘나’라는 존재와 ‘나’ 사이에도, 나와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자기 자신의 과잉’상태를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제 모습들을 받아들이고 낙담하지 않으려고 해요. 사실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실망스러운 부분을 발견하는 경우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신의 약점이 타인에게 탄로날까봐 자괴감은 커져만 갑니다. 그러나 이미 내 자신도 낯선 ‘자기 자신의 과잉’ 상태를 타인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도 나를 모르는데 타인이 보는 나는 더욱 일그러진 상(像)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모습과 타인의 시선에 괴로워하는 이러한 부정적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과거 ‘여행과 지리’라는 교양 과목에서 교수님께서 여행을 하면 자기 자신이 우주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크게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우주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저의 ‘나쁜일이 그다지 나쁜일이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자칫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허무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사실 파스칼 메르시어도 다소 허무적인 관점에서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제가 작은 존재임을 받아들이되, 동시에 가치있는 존재라는 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작지만 가치있는 저는, 나름의 방식으로 제 삶을 풍성하게 더해갑니다.



저는 제 인생이 직선의 언덕길을 오르는 것과 같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다 보면 정상에 올랐을 때 더 풍성하고 나은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지요. 그렇기에 제가 느끼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너무나도 두렵게만 느껴졌습니다. 길을 오르다 굴러 떨어져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사실 삶은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길이 아니라 자신조차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요?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잠잠한 물결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삶의 길은 직선이 아닌 수많은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양이든 될 수 있고, 툭 치면 끊어져버리는 직선과 달리 선과 공백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더욱 단단해져 갑니다. 점선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의 점들이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질지 알 수 없습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인생에서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매 순간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제 자신이 정말 여러 명의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제 자신이 체험할 수 있는 내부의 영역은이미 한정적이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에 과연 삶에서의 경험들의 중요도를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의 어떠한 자아가 겪는 체험이 중요한 것인지 어떻게 판단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을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며 살아야할까요?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매 순간을 모두 세심하게 신경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입니다. 더 나아가, 어쩌면 저에게 중요하지도 모르는 경험을 내가 중요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낙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역으로 인생에서 모든 점들이 중요하다면 그 또한 정말 끔찍한 것일테니까요. 이는 삶의 각 지점들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리고 나태해지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점 하나하나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점 사이의 공백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며 담담해지는 연습을 하고 싶어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맺는 부분으로 넘어가면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작은 일에도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삶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저는 담담하게 저를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은 이 순간에도 사실 앞으로 만나게 될 저의 다양한 모습들과 공백의 순간이 조금 겁나기는 하지만, 저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지점들을 기대하며 제 자신을 충실하게 맞닥뜨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 명의 자아로 구성되어 있다면 제가 제 자신을 정의하고자 했던 시도는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지속적으로 인생의 여러 지점들에서의 제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며 그렇게 제 삶을 꾸려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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