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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xploring myself Mar 17. 2022

EN'T'J가 되고 싶어 하는 EN'F'J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MBTI 테스트를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해 봤지만 나는 꾸준히 'ENFJ' 결과가 나왔다.

ENFJ가 '정의로운 사회운동가'형이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유형이라고 하고, '당신이 현재 하는 사소한 행위는 잔잔한 물결처럼 서서히 퍼져나가 모든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라는 설명문에 꽂혀 예전에는 나의 MBTI 유형에 묘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검사 결과가 'T' 유형이 나온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나를 소개할 때 '나는 EN'T'J가 되고 싶어 하는 EN'F'J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감정형인 'F' 보다 이성적 사고형인 'T'로 살면 사사로운 것들에 감정 소모를 하지 않고 더욱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T' 유형의 사람들이 훨씬 일을 논리적으로 처리하고 수행하는 데 능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 기저에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오래도록 내가 'F' 유형이라는 점을 나의 취약점으로 여겨왔다.


그러던 얼마 전 다시 MBTI 테스트를 해보았고 놀랍게도 내가 그토록 바라던 'ENTJ' 유형이 나왔다.

미약하지만(ㅎㅎ) '51%'로 'T' 유형이 나온 MBTI 결과지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친구에게 결과를 공유했더니 요즘 유행하는 다른 MBTI 테스트도 해보라고 해서 시도해 봤더니 원래대로 'ENFJ' 유형이 나왔다.

T:F=45:55 비율로 나온 새로운 결과지

두 가지 검사에서 모두 'T'와 'F'가 비슷한 비율로 나온 것에 기뻐하며 나도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구나 하며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MBTI를 이토록 신뢰하는 스스로가 웃기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지만 동시에 서글프기도 했다. 나는 내 본연의 성향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자꾸 'T' 유형이 되고 싶어 하는 걸까? 왜 나를 특정한 유형의 모습으로 바꿔가고 싶어 하는 걸까?




스스로를 이성적인 모습의 인간형으로 바꾸고 싶어 애쓰는 나 자신이 안쓰럽게 느껴지던 와중,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읽고 내가 'T' 유형이 되고자 함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쉬워 보이는 방향으로 변화하려고 하고자 했던 원초적인 본능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프롬


프롬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려 하며, 그중에서도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지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한다.

현대의 과제는 무엇일까? 첫 번째 중대한 과제는 19세기 이후 심화되어 온 우리의 자세를 깨닫고 극복하는 것이다. 그 자세란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것, 즉 사고와 감정의 분리다. 우리는 사고를 왜 그렇게 중시하게 되었을까? 무게 중심이 이동한 것은 우리의 생산방식, 기술에 대한 의존성 증가와 많은 관련이 있다. 과학을 위한 지성, 기술을 위한 과학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성과 매우 관련이 깊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지려고 하는 행태를 보임으로써 무리에서 도태되지 않고, 소속 집단에 의존하여 삶의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엔 대부분 평등을 ‘동일’로 이해한다.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과 같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하지 않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오늘날 타인과 같아지려는 경향은 사회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 자신의 확신,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에게 순응하지 않으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지도 모르며 무리에서 추방될 위험이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이성적 인간으로 비치고자 했던 것은 내가 별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소속되고 싶어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는 유형의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자연스러운 열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롬은 인간의 삶은 수단이 아니라 '생명력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지금은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어 다시 인간에게 윗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한다.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본디 한 몸으로서 영향을 주고받는 감성과 지성의 분리를 분리하지 않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현재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감성과 지성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심장과 생각을 따로 떼어 별개인 양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로 그것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현상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을 관통하는 하나의 논리만이, 하나의 합리성 혹은 하나의 비합리성만이 존재한다. 더 이상 우리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혼란스러워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이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일전에 내가 찍은 일상의 사진들을 보고 친구가 툭 던졌던 말을 통해, 스스로가 이 세상에 가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던 경험이 있다.


" 세상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정말 좋아 "

그 당시에는 이 말이 왜 좋았는지 콕 집어 이유를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저 툭 건넨 한마디가 왜 그렇게 나를 설레게 했는지 알 것 같다.




자신의 삶과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며,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에게 윗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프롬의 주장에 따른다면 나의 'F'적 면모는 삶에 생명력을 더하고 인간이 도구에 이끌려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MBTI는 내가 처한 환경에 따른 내 모습을 일부분 보여주는 도구로, 때로는 감성이 또 다른 날에는 지성의 면모가 더 강하게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감성과 지성을 모두 지녔고, 각 면모들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감성'과 '지성'은 어느 하나가 연약하고 또 다른 것은 강한 이분법적 잣대를 드리울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확인한 이상, 나는 나의 두 가지 면모를 모두 사랑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남들과 똑같아지려 하지 않고, 나만의 모습으로 더욱 생명력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또한, 나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는 기술 문화의 발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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