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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 Mar 20. 2017

글을 쓰는 것이 좋은 이유

나는 소통이 하고 싶다.

페북에 간단한 사진과 이것저것 조악하게 글을 올렸다. '좋아요'도 없고 댓글도 없다. 여행을 간 사진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줄줄이 달아준다. 부러워요~, 멋져요~, 나도 가고 싶어요, 잘 놀다 오세요, 사진 이쁘다. 한 번 들어보지 못 한 찬사가 쏟아진다. 하하하~ 뿌듯하고, 기쁘다.

그렇다. 나는 관종(관심종자)이다.


내가 관찰해 온 사람이라는 존재의 특징 중 하나가 자신의 생각, 의견, 느낌, 감정 등을 말하길 좋아한다이다.

자신이 말하고 싶기에, 어떤 이는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준다. 타인이 말을 끝낼 때쯤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는 Give & take로 내가 들어줬으니 상대가 말을 들어주길 원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상대가 듣든지 말든지 전혀 아랑곳 않고 자신의 말만 한다. 주제도 없고, 연관성도 없다. 그냥 자신이 내뱉고 싶은 것만 말한다.

대화가 끝나면, 모두 상대가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말을 해서 내 안의 무언가를 해소하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 간에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쉽지 않다. 상대의 말을 듣고 생각해서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이나 의견을 전달해야 하는데, 이런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내가 운이 없어서 이런 사람들을 주로 만났던 것일까?


최근에 생겨난 맨스 플레인(Mansplain), 화이츠 플레인(Whitesplain)이란 단어를 들여다보자.

(성별과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글의 논점과 관련 없으므로 설명을 생략하겠다.)

설명하다(explain)는 단어가 함유된 이 두 신조어는 모두 타인에게 설명하는 행위를 나타내며, 듣는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채 말을 하는 것을 뜻한다. 설명은 경청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듣는 자들의 이해를 위해 다소 긴 시간을 할애해서 말을 한다. 굳이 요청하지도 않은 이 설명을 왜 이리 열심히 할까? 무엇을 얻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은 알겠다.


글은 이미 쓰여 존재한다. 작가가 쓰고 싶은 혹은 주제 따라 쓰인 글로써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무언가 전달하고 싶거나 내면에서 떠오르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하다못해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쓴다. 결과가 좋으면 아주 뿌듯하겠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부어 창조해낸 결과물을 대중에게 선보였다는 행위로 만족감이 충만하다. 독자는 이것을 선택하여 읽는다. 재미있으면 끝까지 읽고, 재미없으면 덮는다. 독자로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읽을지 자유가 보장된다. 창작자와 소비자의 상호작용이 여기까지 일거라 생각되지만, 너튜브와 X플릭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시공을 뛰어넘어 소통하고 있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라는 에세이 집에서 유럽 어느 대학교에서 가진 독자와의 대담을 읽었다. 한국어로 쓰인 그의 작품이 타 국가의 언어로 번역되어 이국의 사람들에게 읽혔고, 이를 이국의 언어로 각자의 감상의 나누는 그 자리에서 (비록 통역가가 있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자신의 작품이 말해지는 현장에 앉아 있던 작가의 감상은 쉬이 짐작할 수 없겠지만, 상상만으로도 몽글몽글 피어나는 감정이 떠올랐다.  

상호 간 얼마나 아름다운 소통인가? 

작가는 시간을 내어 자신의 글을 읽고 감상을 표현하는 독자에게 감사해하고, 독자는 글을 각자 느낀 감상을 말하며 작가에게 감사해한다. 일방적으로 주입되듯 듣기만 하는 청자가 아닌 서로의 감상과 생각이 오고 가며 느끼는 이 행복한 관계를 나도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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