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인 인생의 기한
올해 2025년 절반이 지났다. 그동안 예상치 못한 부고를 듣게 되었는데. 죽음의 나이대가 모두 달랐다.
90세 할아버지의 자살, 20대 지인의 죽음, 13살 아이의 사고.
다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다.
90세 할아버지는 아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들 부부와 함께 거주했지만 부부의 이혼 후 아들과 단 둘이서 생활했던 할아버지. 확실하진 않지만 전해 들었던 것은 우울증이었다. 할아버지를 알뜰이 챙겨주던 며느리가 떠나고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 이유도 클 거라 짐작을 한다. 물론 며느리분의 밝은 성격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부고를 듣고 떠오른 생각은 '외로움은 평생을 안고 가야 하는 거다. 외로움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였다. 깊숙이 숨겨두고 꺼내기 두려워한 고민거리가 생긴 것이다. (물론 우울증의 원인을 외로움으로 단정 짓는 건 아니다. 다만, 부고를 듣고 상황을 알고 있는 개인적인 시각에서는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 뿐이다)
조용한 아침마다 읽는 중인 책 <외로움의 책>
<외로움의 책>은 '외로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보다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과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중에서 공감이 되었던 글이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
즉 다른 이들에게 애착을 갖고 있으며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세상에 속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양가적인 감정에 시달린다. 가끔은 너무 가깝다고 느끼고, 가끔은 너무 멀다고 느낀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독자성과 친밀함 사이 또는 혼자와 집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고, 사람의 균형감은 저마다 다르다.
<외로움의 책> 중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외로움을 겪고 있는 삶. 그 균형을 개인이 스스로 맞춰가는 것이 외로움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겠지 싶다. 그러나 정답도 없고, 시기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감정을 컨트롤하며 그 균형감을 가지는 것은 결코 쉽지도 않은 숙제일 것이다. 그러한 줄타기를 평생토록 해야겠지. 어렵다. 어려운 숙제이기에 미루고 미뤘던 것인데 90세 할아버지의 죽음이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종종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서도 사유해야 한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20대 지인의 죽음은. 사실 모르겠다. 너무 안타깝고 그동안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과연 그 친구에게 난 도움이 된 친구였을까. 친절한 사람이었을까 하는 되돌아보기를 하게 되었다. 평소에, 일상에서 만나는 직장동료와 친구, 이웃에게 난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시선이 궁금해졌다. 남의 시선에 꽂혀 있지 말고 나 스스로가 '잘했다, 친절했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반성을 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이 바라본 나라는 사람이 궁금해진 것이다.
장례식에서 느낀 것도 크다. 나의 가족은 나의 지인들을 다 알지 아니 사실 거의 알지 못한다. 나의 장례식엔 나의 가족과 지인들이 나의 부재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되는 시간이 될 테지. 그때 나의 가족에게 지인들은 어떤 이야기를 남길까. 어떤 친구였고, 어떤 직장동료였으며, 어떤 이웃이었을지 궁금해진다. 그 이야기를 들을 나의 가족들은 어떤 반응일지도 궁금하고.
8월 급작스럽게 듣게 된 13살 아이의 사고. 나와의 인연은 과거 아이의 8살 때로 돌아간다. 봉사활동을 통해 만난 아이였고, 첫 만남은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차분한 아이는 정말 정말 정말 작은 목소리로 본인의 이름을 말했다. 너무나도 작은 목소리여서 내가 이름을 여러 번 잘못 불렀던 탓인지 그다음 만남에서 맑은 눈망울로 아이는 A4용지에 본인의 이름을 적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쪽지일까 싶어 펼쳤던 난 아이의 이름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해맑게 웃으며 큰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었다.
OOO아~ 반가워!!
아이의 입꼬리도 올라가고 마음의 문을 연 듯 그 뒤로 나를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앉으려고 하고 조용한 목소리지만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조곤조곤 말하는 친구. 그 여린 아이는 약 3개월간 나와 함께 매주 만났고, 그 뒤에는 다른 커뮤니티로 가게 되어 주기적으로 만날 순 없었다. 다만,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였기 때문에 아주 가끔, 종종 그 아이와 동생이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반에는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리서 마주치면 마음속으로 '잘 지내는구나, 많이 컸다' 생각하며 스쳐 지나갔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듣게 된 사고 소식.
사고 내용을 듣고 멍했다. 아이는 여전히 차분하고 책을 좋아했구나. 얼마나 아팠을까. 사고 당시 아이는 책을 들고 자신만의 공간 속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 상황을 들으며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가족들은 얼마나 끔찍했을까. 가족들 또한 얼굴도 알고 간간히 인사하며 알고 지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자꾸 머릿속에서 사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나 또한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는, OO는 하늘나라에 갔구나.'상기하며 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문득 교복 입은 아이들을 지나칠 때마다. '저 아이도 OO와 비슷한 나이대겠구나', 'OO이 6개월 뒤에 교복 입은 모습을 기대했을 텐데', '아이의 엄마는, 아빠는, 동생은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아이의 엄마와 주고받았던 과거 메시지를 읽어보며 8살 때의 사진을 보고 울컥울컥 하는 순간들. 어쩌면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인생에 있어서 짧게 스쳐간 점 같은 존재인 인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찰나의 그 여운은 기억에 남았고, 따스했던 아이의 미소가 계속 떠오른다. 아이와 사고를 잊자는 생각을 하기보다 아이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길 바라며 울렁울렁하는 내 마음도 다스리려고 노력 중이다.
우연한 시기에 스토아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에세이 중 일부를 엮어 만든 책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를 읽고 있었다. 그중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라는 에세이 부분을 읽으며. 제목처럼 인생의 짧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뇌리에 박혔던 몇 가지 문장들.
.. 인생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착각...
온전히 스스로를 위해 보낸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인생의 일부만을 진정으로 살고 있다. 나머지는 삶이 아니라 단지 흐르는 시간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인생은 흐른다> 중에서
인생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는 과연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허투루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들. 어쩔 수 없는 시간들이고, 과거이지만 과연 난 앞으로 이 짧은 시간을 과연 내 뜻대로 나의 온전한 시간으로 쓸 수 있을까. 그런 준비된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과 반성,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다가왔다.
90대 할아버지의 자살, 20대 친구의 죽음, 10대 아이의 사고.
숫자만 봤을 땐 누군가는 길다고 누구는 짧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상대적인 그 시간들 중에서 어느 누구의 시간도 적당한 때는 없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이별이었을 죽음.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과연 난 얼마나 길고 짧은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과연 난 스스로 평가했을 때 흘러 보낸 시간보다 온전히 보낸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 순간은 언제였는지 떠올려 볼 수 있을까. 자문하면서 완벽하진 않아도 노력하는 하루를 보냈고,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