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를 읊어보며
얼마 전 친구가 그랬다. 어디선가 읽은 책에서
사람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시를 읽지 않는 사람, 시를 읽는 사람. 그리고 시를 쓰는 사람으로.
앞에 두 분류는 듣자마자 예상 가능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를 쓴다는 건, 어렸을 적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쓰던 동시정도의 순수하고 귀여운 시, 아니면 문학 책에 나오는, 아주 가끔 삶이 지칠 때 찾아보게 되는 그런 성숙하고 농도가 짙은 전문가의 시로만 구분되었는데. 어느 정도의 진입장벽이 느껴지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랑은 좀 거리가 있는 그런 취미라고 여겨왔다.
그래도 친구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며칠 뒤 지난 여행노트를 슬쩍 읽어보다 떠오른 "시"라는 대상. '나도 한 번 써볼까' 싶은 마음에 두툼한 메모지를 눈앞에 두고 거침없이(?) 써봤다. 나름 머릿속에서 운율이라는 걸, 어떤 비슷한 리듬감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 보며 그때의 느낌과 교훈을 담아 끄적여봤다. 제목은 미정이지만, 내용만 보면 스스로 어떤 순간을 떠올리고 썼는지 단 번에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막상 쓰고 나니 개운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설레었다. 함축해서 쓴 단어의 모음들이 야무져 보인다고 할까. 길게 쓰는 글도 어려운데 짧지만 그 속에 감정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글은 또 다른 재미가 있다는 걸 느껴봤던 시간이었다.
종종 시라는 걸 써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이야기를 해준 친구에게 고마웠다. 언젠가 그 친구에게 덕분에 시를 써봤고 그중에 한 편을 너에게 소개할게라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 친구도 보람 있어하지 않을까 싶다.
시를 쓴다는 생각을 하니. '가사'라는 장르가 떠올랐다. 약 1년 전에 난 작사가라는 작은 꿈을 꿔본 적이 있다. 빠져있던 드라마 속 OST의 가사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그 운율이 감미로워서 나도 이런 작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작사가에 대해 알아보고 학원도 찾아보았다. 물론 시간적(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없던 탓에 독학으로 해볼까 싶어서 관련 책을 읽어보며 작사를 연습해 본 적이 있다. 나만의 가사를 완성하진 않았지만 연습으로는 이미 있는 노래의 가사를 필사해 보는 것이었다. 필사로만 끝나지 않고 파트를 분석하고 해석하며 이 노래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며 새삼 작사라는 예술을 맛보고 음미한 기분이었다. 마냥 노래만 흥얼거렸던 지난날과 다르게 더욱 노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느낌.
그렇게 한동안 주기적으로 연습을 하다가 흐지부지 멈추게 된 취미였다. 가끔 생각은 났지만 막상 노래 듣고 가사를 읽고 해석하기 위해 사유하는 작업이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 어렵게 느껴졌다.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볍게 못 넘기겠더라.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다. 책만 읽는다고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가사를 곱씹다 보면 시를 한 편 반복해 읽는 것 같은 몽글한 기분이다. 어떻게 짧은 문장에, 이러한 단어들이 조합되어 운율을 만들고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걸까 하는 존경심도 떠오른다. 그렇게 오랜만에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한 곡 선택해서 반복해 들으며 가사를 적어봤다.
'어? 이런 노래였어?' 싶은 감동이 있었다. 이승윤의 <폐허가 된다 해도>라는 곡이다. 이승윤 작사 작곡으로 이뤄진 앨범들. 그만의 시적인 가사를 좋아하기에 노래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습관처럼 듣다 보니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한 노래가 꽤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중에서 <폐허가 된다 해도>도 포함된다. 제목만 보고 추측했을 때 이 노래는 삶의 고단함 속의 희망을 메시지로 남은 것이 아닐까라는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가사를 필사하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이야기. 바로 사랑의 노래였다. 진심 어린 사랑 고백이었던 것. 내 나름대로의 해석으로는 그랬다. 유한한 인생인 '나'라는 삶의 주인은 '나'인데, '너'는 그런 나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사랑이라고 돌려 돌려 고백하는 노래였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사랑이 가득한 가사였다.
어떻게 직접적인 단어 없이도 그 의미를 가지각색의 표현으로 조화롭게 펼쳐낼 수 있을까 싶다. 시인도, 작사가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수많은 의미를 파헤쳐보고 선택함과 동시에 가다듬으며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겠지.
최근 들어 1차원적인 문장들만 읽어왔던 거 같다. 세상 속 정처 없이 떠도는 글들을 스쳐 보며 '읽었다'라고 착각한 시간들이 쌓이고 있다는 걸 느낀다. 책 보다 온라인 속 세상에 빠져들어 짧고 짧은 글에만 익숙해지는 거 같다. 함축적인 말이 어려운 건 맞는데, 어려워서 재밌던 얼마 전과 다르게 요즘은 귀찮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를 쓰는 사람' 이야기를 해준 친구 덕분에 다시금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던 기회라고 생각한다. 사유하는 삶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렵게 느껴져도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또 펜을 들보고자 한다. 이제는 타자보다 직접 손으로 쓰는 글을 우선으로 여기고. 생각을 글로 써보는 습관에 시간을 더 채우고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