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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학교에선

지식보다 사회성과 정서적 안정감을 더하기

by 미앞

앞으로 학교에선 무엇을 배우고 경험해야 할까. 현재 자녀가 없는 사람으로서 남의 이야기, 어쩌면 먼 미래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주변에서 출산하는 지인들,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기들, 랜선 조카들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어떤 경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떻게 성장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사실 뉴스에서 떠들썩하게 이슈 되고 있는 교권문제 등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뿐 아니라 가정교육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받아 들고, 그럼 학교에서는 과연 어떻게 방향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어렸을 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부모님에게 궁금증을 물어보는 경우가 참 많았던 거 같다. 그중에서 정확하게 확답을 주는 적도 많았지만, 어쩔 땐 '엄마도 모르겠다'라는 답변을 받으며 의문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어른인 엄마가 이걸 모를 수 있구나?'라는 순수한 의심과 의아함이라고 할까. 그러면서 수학이나 역사 등 학교에서 다양한 과목을 배우며 궁금한 것을 선생님께 여쭤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직업이 교사가 아닌 부모님이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질문은 선생님께 물어봐야 한다는 사고가 생긴 거 같다. 각 분야의 지식을 가르치는 곳으로 여겨진 학교라는 존재. 눈치채지 못했지만 학교에선 정보력을 얻는 거뿐만 아니라 사회성을 배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지식과 정서, 교감, 신뢰 등 사회생활을 대비한 예행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자 틈틈이 사회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


올해 유치원생 자녀를 둔 지인과의 가벼운 대화에서 발견하게 된 앞으로 학교에 대한 방향성. 지인은 최근에 산수를 배우는 자녀들을 통해 아이들과 자신과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걸 크게 느낀다고 했다. 흔히 '우리 때만'해도 라는 생각이 든다며 옛날이랑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아이들이 배우는 지식들을 현재 어른인 지인이 요즘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로서 아이들 교육에 대한 어려운 점이 많다며 그 차이를 설명해 줬다.


지인의 자녀들은 산수를 배우고 있는데 그중에서 뺄셈에 대해서 배울 때 이해하는 사고 과정이 큰 거에서 작은 수를 빼는 게 아니라 작은 거에서 얼마큼 더해야 큰 값이랑 동일해지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쉽게 이해하자면, A가 5개의 사과를 가지고 있고 B가 3개의 사과를 가지고 있다. 이때 B가 A가 가지고 있는 사과만큼을 가져야 한다면 몇 개의 사과가 필요한가라는 문제라고 했을 때. 어른인 나와 지인의 사고에서는 더 많은 사과를 가지고 있는 A의 사과 개수 5에서 B의 사과 개수 3을 "빼는" 작업을 통해 2개의 사과가 필요하다는 걸 설명한다면. 지인의 유치원생 자녀들은 B의 사과 3개에서 5개의 수가 만들어지려면 2개라는 사과를 "더해야"한다는 과정을 설명한다고 한다. 뺄셈을 뺄셈이 아닌 필요함, 덧셈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법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때는 뺄셈을 뺄셈으로 이해했는데, 지금은 뺄셈을 덧셈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라니 산수 외에도 얼마나 다양한 과목에서 어른인 우리들에게 새롭게 느껴질지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참고로 해당 사고방식은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근 20년 전에 받은 나와 지인에게 적용된 상황이다)


사고방식도 교육법도 달라진 요즘인 동시에 검색 한 번으로 폭넓은(혹은 폭 좁은) 정보력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정보력에서도 차이가 느껴지는 상황인 것이다. 때로는 아이들이 검색하는 질문들이 AI와 소통하는데 효율적일 때도 있을 것이고, 검색 기능을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활용하는 어린이들에게 앞으로 떠오르는 궁금증은 선생님을 찾아가거나 부모에게 묻는 것이 아닌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이미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럼 예전에 느꼈던 학교라는 공간은 현재,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개인적으로 앞으로 학교에선 인성, 정서, 감정, 교감 등 정보 중심적인 교육이 아닌 사회성 중심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도 이뤄지고 있는 교육이지만 이제는 더욱 치밀하고 세심하게 사회성 중심으로 "학교"라는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서 이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 한편으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지적인 수준 이상의 학생일지라도 과연 학교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 단순한 교육뿐이겠는가 싶은 생각이다. 물론 사회에서 독립적인 활동을 통해 자립심을 키울 수도 있는, 맨땅의 헤딩하는 아이들도 볼 수 있다. 그 아이들의 모험심과 도전심 또한 격려와 응원이 필요한 부분인 건 맞다.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이 사회에 당장 뛰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학교에서 보호받으며 안정적으로 배워나가야 할 교육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교육이 어떤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나눠줄지는 앞으로의 학교에서 생각해야 할 방향성인 것이다.


언젠가 구독 서비스로 읽고 있던 롱블랙에서 본 글이 있다. 제목은 <브라더스키퍼: 칼을 품고 자란 보육원 소년, 식물로 형제들의 삶을 지키다>였다. '칼, 보육원, 식물'이 단어들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호기심이 생겨 주의 깊게 읽게 된 글이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브라더스키퍼 조경업 브랜드이고, 창업자의 과거를 통해 단단하게 만든 사회적 가치가 담긴 브랜드이다. 보육원 출신의 창업자는 단순히 일자리를 창출해 보육원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결핍을 채워줄 기둥이 되기로 한다. 일자리 제공을 통해 책임감과 성실, 인내와 신뢰 등을 쌓아서 브라더스키퍼의 존재감을 만들어 내고,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고객의 니즈를 먼저 파악해 세심한 전략으로 조경업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이다. 여기서 주목했던 점은, "후원이나 일자리보다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정서적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라는 김성민 브라더스키퍼 대표의 말이었다. 정서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오히려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보다 사랑을 줄 때 정서적 회복력이 몇 배는 더 높다'는 연구 결과"를 참고했다는 것이다. 사랑을 줄 곳을 식물이라는 대상으로 채웠고, 그 사랑을 나누고 스스로 결핍을 채우면서 아이들이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찾아 사회생활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참고한 이유는, 앞으로 학교에서 고려해야 할 방향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겨져서이다. 물론 보육원 아이들이 겪는 정서적 결핍을 학교에서 채워야 할 것으로 대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비교군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다만, 언젠가 학교에서 배우는 정보는 손가락 한 번의 터치로 충분히 검색해 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이고 더 풍부한 지적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환경이기에, 학교에서 받아야 할 교육은 사회성과 정서적 안정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연결하게 되었다. 나 혼자가 아닌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꾸려가는 "반"이라는 공간을 통해 사회성을 경험하고, 가족 외에도 타인과 함께 생활하며 채워가는 정서적인 안정감과 신뢰를 느끼는 곳. 그곳이 어쩌면 미래의 학교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로부터 10년 사이에 과연 어떤 존재감으로 학교가 떠오를지 문득 궁금해진다. 1년 사이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것들로 휘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교육과 학교라는 분야는 어떻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킬지, 혹은 과연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켜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앞으로의 학교에선 과연 어떤 방향으로 일상을 채워갈지 궁금하고 기대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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