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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으로만 Aug 02. 2021

진짜 멋쟁이

가격에 쫄지 않는 곤조를 가진 자

샤론 스톤의 갭


샤론 스톤이 1996년 아카데미 시상식 의상으로 갭 터틀넥을 입었다는 사실은 당시 상당히 화제가 됐다. 함께 코디한 옷이 발렌티노 스커트와 아르마니 턱시도 드레스였다는 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채,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그 거룩한 아카데미 시상식에 싸구려 갭을 입고 등장했다는 뉴스는 별다른 해설이 달리지 않았음에도 그 자체로 신선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 못해 자칫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을 이너로 입은 갭 터틀넥으로 대역전 시킨 홍보담당자에게 박수!


이 일은 원래 입으려고 계획했던 베라왕 드레스가 배송 트럭에 깔려 타이어 자국이 나는 바람에 선택한 궁여지책이었지만, 대 여배우는 갭으로도 멋진 시상식 룩이 가능하다는 참신함과 동시에, 일부러 의도했다면 절대 가질 수 없었을 검소하고 수수한 여자 이미지로 고무되어, 이후 같은 시도를 한번 더 하고 한번 더 성공한다. 


이번에는 다분히 노린 티가 나는데, 2년 후 아카데미 시상식에 당시 남편이었던 필 브론스타인의 갭 화이트셔츠에 베라왕의 실크 스커트를 매치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번에도 찬사가 쏟아졌음은 이 사진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남편 셔츠의 단추를 배꼽까지 풀어헤치고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 저 치밀함을 보라.


아마도 샤론 스톤이 처음은 아니었을 이런 시도는 이후 헐리우드는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다. 2014년 MAMA 때 강소라의 H&M 원피스는 글래머러스였다. H&M이라고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모르긴 해도 최소 발렌티노나 오스카 드 라렌타 급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강소라 덕에 이 H&M 원피스는 품절 대란이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안목이 없냐

아무개 작가의 책 제목이다.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홍보를 위해 노출된 책 속 문장을 통해 추정컨대 작가는 돈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안목을 포기했다고 했다. 


"나, 자신 있게 말하건대 결코 안목이 없지 않네. 오히려 나의 높은 안목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왕왕 있는걸. 가격표를 보지 않고 그저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르면 여지없이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니 말일세. 그러니 내가 안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네. 그런데 내가 가진 물건들이 하나같이 왜 그따위냐고? ‘안목’이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이네. 내 경제적 형편을 고려해 물건을 골라야 하기에 높은 안목대로 물건을 살 수 없는 노릇이라 하면 믿어주려나. 철저하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고려한 소비를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말하려니 목이 메는구먼.)"


하지만 나는 이 문장에 반대를 해야겠다. 단언컨대, 돈 없이도 안목은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스타일리스트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설파하는 당당한 태도와 아이템들 간의 스마트한 매치가 필요할 뿐. 


다만 오해는 없으시길. 아무개 작가가 말하는 '안목'에는 그저 외양 뿐만 아니라 내구성과 기능이 좋은 상품들이 취해야 할 최소한의 대가로 매겨 놓은 값도 있을테니, 특히 맥북 같이 정가가 딱딱 박혀 있는 경우가 바로 디자인으로 보나 기능으로 보나 애플이 어울리는 내 취향을 돈 앞에 포기해야 하는 바로 그 예가 되시겠으니 그런 예가 아주 많긴 하다.


그래도, 이렇게는 말해 보련다.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요즘은 일종의 능력치로 인정받는 분위기인 안목 또는 감각 또는 센스 또는 취향으로 통용되는 것과 돈의 상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과 관계라고까지 말 할 수도 없는, 즉, 충분조건이긴 해도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장황한 설명 보다는 반대의 예를 드는 편이 훨씬 간단할 것 같다. 값 비싼 물건으로 치장한다고 무조건 멋있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만원대 명품인 톰 브라운이 우리나라에서 잠시나마 양아치 패션으로 전락한 사연이나(다행히 요즘은 다시 브랜드 본연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고 함), 인간 샤넬 제니는 너무 예쁜데 구찌 운동화에 지방시 백팩에 발렌티노 맨투맨을 걸친 회사 동료는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았던 장면을 떠올려 보면 돈이 안목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는 없다는 것에 동의가 되지 않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돈과 미는 딱 잘라 정의 관계라고도, 역의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고 급기야 무슨 문화인류학자처럼 몽롱하게 말하게 되는데, 적어도 정의 관계만은 아닌 것은 주변에서 목도하게 되는 수많은 사례로 입증 가능하다.  


필요한 건 곤조

옷 하나 입는데, 물건 하나 고르는데 무슨 엄청난 철학을 가지자는 말은 아니다. 남들이 한 게 이뻐 보여서 나도 사는 것도 충분한 소비의 이유다. 일반인들이 든 텐꼬르소꼬모 캔버스백을 숱하게 봐 왔어도 눈길 한번 안 가더니 윤여정이 유럽에서 그걸 들고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회가 동하는 심리를 탓할 자 누구란 말인가.


발렌티노와 갭을 매치한 샤론 스톤이 쿨해 보이는 이유는 대스타도 저렴이를 입는다는 식상한 센세이션 보다는 톱스타의 스타일이 브랜드 네임 밸류의 틀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요즘 진짜 쿨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서 모자부터 신발까지 브랜드 견적이 완벽하게 스캐닝되지 않고, 스캐너가 멈칫멈칫 하면서 '이건 뭐지? 어디꺼지?' 의문을 갖게 하는 아이템과 브랜드 아이템의 믹스매치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샤론 스톤이니까 갭을 입어도 예쁘지, 패완얼 몰라? 그리고 명품이랑 같이 입었잖아, 난 믹스매치를 할래도 가진 명품이 없어' 하실 분들께 한 마디.  비싼 골프웨어 산 게 아까워서 여기저기 외출할 때 마다 다 입고 다니지 마시고, 때와 장소에 맞게만, 가진 게 무엇이든 말끔하게 세탁하고, 보풀이나 먼지는 돌돌이로 좀 떼 내고, 자연스런 구김이 멋인 옷 빼고는 빳빳하게 다리거나 손으로 마름질 해서 입으시면 절반은 한 거라고. 


그저 소비의 수많은 이유 중 유행이라서, 누가 걸쳐서 대신, 온전히 내 눈에 예쁘고, 내가 오래 잘 사용할 것 같아서의 비중이 커지는 게 건강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명품을 입고도 멋이 안 나는 사람과 알고 보면 동대문표인데 마치 명품인 것 처럼 연출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으니, 가격 앞에 쫄지 말고 내 안목과 꼿꼿한 태도를 믿어봤으면 좋겠다. 


동시에, 꼭 누군가 먼저 가 본 안전한 길을 따라가지 않고 내가 좋은 걸 해도 내게는 충분히 안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다. 집집마다 있고 여전히 백화점 7층에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포트메리온 보타닉 세트를 과감히 지나쳐, 당근마켓에서 산, 빈티지도 아닌 밀크글라스 볼에 시리얼 타서 먹는 당신이 훨씬 힙하다는 걸 말이다. 인테리어 좀 안다는 집에는 다 있는 것 같은 몇십만원 짜리 북유럽 조명은 못 들여놔도 내 눈에 예쁜 이케아 스탠드로 분위기 내고 어두운 곳 밝히면 그만이라는 걸.


또, 예나 지금이나 제인 버킨 같은 세기의 멋쟁이들은 청바지에 흰 티에 흰 운동화(물론 골든구스 아닌 케즈)를 신고 누구보다 쎈 아우라를 풍겼고, 또 다른 멋쟁이들이 그들의 그런 모습을 인정해 줬다는 것과 실제로 청바지에 흰 티를 멋있게 입는 건 옷입기 기술 중 최고 난이도라는 것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도.


젋은 제인 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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