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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으로만 Nov 20. 2021

백해무익한 피드백의 쓸모

인생 최악의 피드백이 남긴 것


"마케팅에 그렇게 오래 있었고 기여도 했는데, 너 떠날 때 왜 아무도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너 못 준다고 안 했을까?"


상황인즉슨, 9년간 마케팅 부서에 있다가 허울 좋은 버전으론 내가 원해서, 실상은 경쟁에 밀려 실장 진급은 못하고 같이 팀장 하다가 실장 된 동갑내기와는 피차 불편하니, 늘상 새로운 것 해 보고 싶다고 징징거렸던 내 하소연을 핑계로 신규 사업부로 발령이 나기 직전, 새 부서장과의 첫 면담이었다.


그 날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 처럼 굴었다. 하루종일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카톡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언사를 그대로 전달하며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 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심지어, 금요일이었던 그 날 퇴근 후 오밤중에 ‘난 그런 말 들을 만큼 회사 생활 허투루 하지 않았으며 당신에게 그런 언사를 들을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 오전에 한 말을 당장 철회해 달라’며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그 양반의 집으로 찾아갈 생각까지 했었다.


남편에게 ‘너는 늘 말 같지 않은 소릴 듣고 와서는 그 자리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나중에 혼자 끌탕하는 바보짓을 한다’는 13년 고정 레퍼토리를 들은 것은 물론이다.


저런 종류의 말은 다분히 기선제압용이다. 상대의 입틀막을 위한 공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저런 종류의 말을 듣고는 '아 그래, 내가 소중한 사람이었으면 나를 잡았겠지, 앞으론 더 열심히 해서 잡히는 사림이 되자'고 생각할 확률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그는 내 보스가 되기 전에는 옆 실의 실장으로서 밥을 먹자는 둥 술을 먹자는 둥 해서 친한 척 하는 옆집 아저씨 캐릭터를 표방했었다. 그 연기에 깜빡 속아서 어느 날은 근무 시간 중에 뜬금없이 산책을 따라나가서 뭔 소린지 나도 헷갈리는 몽롱한 얘기들을 애매하게 지껄이다 온 적도 있다. 손바닥 만한 목련잎이 낭자했던 그 날을 생각하면 나의 철딱서니 없음에 절로 이불킥이 차진다.


그랬으니 보스가 되고 나서는 ‘나는 니가 생각하는 그런 옆집 아저씨가 아니고 너의 평가자야. 우습게 보지 마, 그리고 일 똑바로 해’ 이렇게 태세 전환한 거다. 만약 그저 으름장이 아니라, 내가 조직의 쓴 맛을 알고 정신 차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한 소리였다면, 그런 충격 요법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해맑은 시도 정도로 해 두자.


그러나 의외로, 백해무익해 보이는 피드백에도 쓸모는 있었다. 바로 '백해무익한 피드백에는 귀를 닫자'는 처세 하나를 추가하게 된 것이다. 

(아쉽게도 '내가 안 잡힌 이유를 나는 알지만 너님에게 그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고 하기도 싫은데요?' 라고 한방 날릴 내공은 아직 실전에서 사용해보지 못했다.)


내 성실성, 내 책임감, 내 주인의식의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 스스로 저 기본 덕목에 떳떳하다면, 나를 갉아먹기만 하고 털끝만큼의 나아짐도 보태지 못할 피드백에는 지금까지 못 받은 조직으로부터의 인정을 얻기 위해 절치부심, 불철주야 할 게 아니라 완전히 무시하는 게 맞다.


강직하고 자기 검열이 강한 사람일수록 저런 공격 앞에서 '찔리는' 모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소리로 무시하고 앞으로 저런 멘트 앞에서는 ‘나는 당신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당당함을 준비하는 게 낫다.  설사 그런 말을 들을 만 했다 하더라도, 저런 피드백은 상황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일깨워 줄 수 있는 레벨까지 내공을 올리면 더 좋다.


이렇게 나는 준비가 됐는데 세상은 늘 아이러니하여 또 이렇게 준비 돼 있는 자에게 바로 기회가 오지는 않는다. 내가 애송이로 보였기에 무례하고도 아무 소용 없는 멘트를 듣는 처지에 놓였던 것 처럼, 애초에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격이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어쩌면 이런 준비는 의미없는 공방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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