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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으로만 Nov 21. 2021

나는 마케팅이 싫다

싫은 걸 안 하기 위한 브랜딩


몇 년 전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의 글에 푹 빠져 탐독했던 때가 있었다. 그의 산문집 중에 하기 싫은 걸 하지 않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해서 의대 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뭘 싫어하고 그걸 안 하기 위해선 뭘 해야 하나를 생각해 보게 됐다.



그 때는 공기 중의 산소만 공유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회사 사람들이 싫고, 그들과 하는 답 없는 회의가 싫었고 그걸 안 하려면 퇴사 밖에 답이 없어서 퇴사하겠다고 했었다. 전배 발령 받아 눌러 앉아서 부업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지금, 사업을 하면서 하기 싫은 건 다름 아닌 마케팅이다. 정확히 말하면, 실체 없는 마케팅과  마케팅에 목 매는 게 싫다.


개뿔 아는 건 없어도 커리어 중에 가장 오래 한 게 마케팅인데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를 따져 보니, 안 그러려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결국 우리가 전하려던 메세지는 '우리 물건은 남들과 다르고 좋으니까 사세요'가 아닌, '이왕이면 싸게 사는 게 좋잖아요'로 설득력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치킨게임은 현실이고 그게 싫거나 거기서 이기려면 해자를 갖추는 수밖에 없다는 걸 누가 모르나? 많은 경우에 먹고 살기에 집중하다 보면 이 부분에 대한 투자가 '하긴 해야 하는데 바빠서 못하는' 운동이나 영어 공부 같아져서 나중으로 미루고 미루다가 때를 놓쳐 버린다. 운동과 영어가 정신차린 그 날부터 시작할 수는 있어도 그때부터 상당 시간 꾸준함을 경주해야 결과를 볼 수 있는 것 처럼, 해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해자를 갖추기 위한 노력은 Day 1 부터 할수록 유리하다.  


안타깝게도,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없는 집도 아니었음에도 때론 내 한 몸이 아니라 집안을 먹여 살리느라) 이 노력을 꾸준히 못했다. 어느 날 생각나면 했다가 이내 중단하고 급한 일에 몰두하기를 반복했다.


업력 20년을 시장 선점 효과로 활용하지 못하고, 어디서 갑자기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경쟁사가 불나방처럼 덤벼들 때마다 예외없이 고군분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진입 장벽도 그다지 높지 않은 엇비슷한 서비스 제공자임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고객이 고민없이 선택할 이유를 만드는 데 투자했다면 지금쯤은 승자의 여유를 조금은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장사를, 그것도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파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상품을 판매하는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마케팅이 싫다는 건 사실 무척 어리석다. 아무리 마케팅이 싫다고 해도, 사업소득은 예외 없이 재화를 제공한 댓가를 취하는 것이고 어떤 서비스든 제공자가 세상에 나 하나일리는 만무하기에 무수한 상품 중에 내 것이 달라 보이게 하는 마케팅은 해야 한다. 다만 내 것을 사라고 권하는 근거가 단지 가격 뿐인 순간, 내 것의 가치가 상품 자체에서 발화되지 못하고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또 다른 비용을 추가해야 할 때 고통이 시작된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 애송이 사업가 주제에, 마진을 깎아내리는 것 말고는 노답인 상황이 싫어서라도 내 상품(뿐만 아니라 상점 및 모든 서비스 포함)의 다름을 벌써부터 고민한다. 다른 상점에 없는 나만의 상품에 대한 고민 못지 않게, 누구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을 하필이면 내 상점에서 사야 할 이유를 집요하게 자문하고 있다. 제조하고 독점하지 않는 한 유일무이한 상품은 없기에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타당하다.  더불어, 많이 이른 고민일지라도, 무수히 많은 상품 속에서 내 상점의 상품을 고르는 소위 소싱을 할 때도 이 기준을 따르게 되기 때문에 당장도 꽤 유용하다.


Crate&Barrel 창업자가 한 인터뷰에서, 대학생 때 산 그릇을 20년 넘게 쓰는 고객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파타고니아의 용감무쌍한 광고 카피 'Don't buy this jacket'은 레전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소비가 미덕인 것 같으면서도 자성의 대상인 아리송한 시대에, 한번 사서 오래 쓸 상품만을 고르고 또 골라서 20년 전에 산 그릇을 식탁에 올려도 싫증나거나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고, 20년 넘게 쓸 그릇이라고 가계에 부담을 주거나 애지중지 모시듯 써야 하는 상품들로만 채우지 않는 생활인의 브랜드.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그런 브랜드라면 세일 고민, 쿠폰 고민 대신, 고객이 진짜 필요로 하는 가치가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줄지를 고민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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