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을을 뿐만 아니라 좀 지겨워 하는 편이다. 한 때 직속상사가 걸핏하면 이 16분면의 잣대를 들먹이며 레이블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거의 첫 인사가 "넌 뭐야? 난 이건데" 였고, 동료 중 한 명은 'MBTI 만든 사람 죽여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넌더리를 냈었다.
그러나, 그 16분면 중 E와 I의 구별에 있어서는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 뒤의 3개(S/N, T/F, J/P)는 검사를 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데 I는 확고하고,
- I 쪽으로 90% 가량 치우쳐 있는 것도 변함이 없으며,
-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과 만나며 에너지를 뺏기는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처음 본 사람과도 말 잘 하고, 공적인 장소에서 꽤 사교적으로 보이는 건 생존과 생계를 위한, 본색을 감출 수 있는 짧은 시간 동안만 가능한 일일 뿐이다.
내향적인데다 나이가 채 들기도 전부터 점잖은 게 좋은 거라는 고정관념이 자기도 모르게 체화되고, 암암리에 호들갑 보다는 무심하게 팔짱을 끼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게 된 나에게 진심을 담은 리액션의 기억은 드물다.
고등학생쯤 부터 모든 것에 시니컬한 사람들이 멋져 보이고, 나도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속으로는 흥분할지언정 겉으로는 시큰둥한 척 했다. 나는 그저 쿨하고 싶었다.
뚜렷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크한 게 좋은 것이며 시크함은 곧 호들갑 떨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를 잡자 그대로 직진, 이게 맞나 하는 반추는 없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그런 태도는 강화되었다.
회사에서도 칭찬과 치하의 순간은 없지 않지만, 비중으로 따져보자면 호들갑 보다는 놀라울 것 없다고 어른인척 냉소하는 반응이 훨씬 흔하다.
오히려 별 것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떨다가 무안해졌던 경험이 축적되다 보면 반응을 보여야 하는 순간에도 무반응하게 되고, 무감각에 익숙해진다.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분개하는 것도 잠시, 어느 새 나는 그들이 시큰둥해 할 때 상처받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심지어 자기는 포커페이스가 도저히 안 된다며 평정을 유지하는 것 처럼 보이는 나를 신기해 하고 대단하다고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등학교생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가?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상황에서 분노,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을 제한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감정 배제 훈련을 하는 은연 중에 긍정적인 감정까지 무져진다는 것이다.
잘 쓰지 않으면 사용법을 잊어버리는 법. 꼬리뼈가 퇴화하듯 나의 반응하는 감각, 특히 칭찬하고 환호하는 긍정적인 감각은 죽어버렸다.
너무 예민해서 빗방울에도 삑삑대는 내 차의 장애물 감지 센서처럼, 공격받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 기재는 무척 예민한 대신, 교류하고 공감하는 센서는 아예 꺼져 있었다.
꺼져 있던 공감 센서가 다시 켜졌을 때 느낌은 마치 어두운 곳에 오래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와 눈을 잘 뜨지 못하는 것 같은 어색함, 불편함, 분명 알았던 건데 새삼스러운 그런 것이었다.
방어 기재를 끄고 공감 센서를 다시작동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3가지였다.
첫번째 계기는 퇴사를 앞두고 읽은 책 '영감'.
저자 이승희는 영감은 호들갑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마저마저!', '어쩜~~!' 이런 호들갑이 공감의 시작이고 영감은 공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영감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관찰이 의미 있으려면, 그냥 보고 인지하는 것을 넘어 나만의 사유로까지 이어진 후에야 비로소 영감의 영역으로 발전하는데 그 시작이 관찰한 것에 대한 호들갑이라는 말이다.
호들갑을 불러 일으킬 정도의 감동 없이 영감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두번째는 성경 말씀이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누가복음 7장 31, 32절은 서로의 경사와 애사에 반응하지 않는 세태를 적시한다. 2천년 전 예수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빠 남의 기쁨과 슬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요즘 사람들은 사고나 재난, 전쟁 등 명확한 어려움에는 빠르게 반응한다. 재해 복구를 위해 봉사를 하거나 병든 할머니와 사는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위한 월 1만원 자동이체를 모두가 하지는 않더라도, 여기에 반응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재해, 재난보다 훨씬 자주 맞닥뜨리는 일상 속 반응에 대해서는 자못 방관하는 것 같다.
많은 경우, 우리는 발표자가 아닌 청중이다. 그래서 청중의 역할에 익숙하지만, 입장이 바뀌어 회의를 리드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하다 못해 SNS에 컨텐츠만 올려봐도 반응은 사무치도록 소중하다.
회의, 발표, SNS에 있어 가장 난감하고 피하고 싶은 상황은 바로 무반응이다. 오죽하면 악플보다 무플이 더 나쁘다는 말이 있을까. 이건 뭐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동의한다는 건지, 반대한다는 건지 말은 커녕 표정도 없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자면 답답하기가 고구마 100개는 먹은 것 같다.
반대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을 하고 피드백을 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미팅을 리드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든든함은 물론이고, 그 반응이 물꼬가 되어 정적이었던 모임이 몰라보게 활성화되기도 한다.
할 말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항변할 수 있다. 할 말이 없고 의견이 없다는 의미의 뿌리를 한번 들여다 보자. 이건 곧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억지로 와서 의무적으로 자리만 채우고 있으니 앞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귀에 들어올 리 없고 애시당초 들을 생각도 없는 게 솔직한 거 아닐까?
공감 센서를 켜야겠다는 결심에 쐐기를 박은 마지막 계기는 인스타그램이었다. 그릇 장사를 하는 내게 인스타그램은 필수 채널이다. 집에서 요리를 하고 예쁜 그릇에 담아 먹고, 심지어는 사진까지 열심히 찍어 부지런히 올리는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시작은 했지만, 내 컨텐츠는 기깔나게 멋있지도 않고 다른 데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도 아니기에 꾸준히 피드를 올리는 것 만으로는 전혀 활성화가 되지 않았다.
전단지 한 장 안 뿌린 채로 가게 문만 열어놓고 턱 받치고 손님 기기다리는 성실한 초보 사장님처럼, 쥐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피드라도 주구장창 올리다 보면 심미안을 가진 훌륭하신 고객님들이 제발로 찾아와 줄 거라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4개월 동안 팔로워 20명 늘리기에 그치자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스101 염미솔 대표 강의를 결제했다. 교류가 생명인 공간에서 아무런 교류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게 문제였다는 걸 강의 시작 몇 분 만에 알 수 있었다.
음식을 좋아하고 열심히 해 먹고 그 모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닌 후에야, 수많은 일반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스토리를 만들고, 얼마나 열심히 남의 피드에 가서 인사하고 칭찬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감을 얻어 내기 위해 그들이 하고 있는 각고의 노력과 훌륭한(때론 예술적이기까지 한) 피드를 보다 보면 저절로 감탄하고 칭찬을 하게 된다. 호들갑을 떨게 된다.
실생활에서보다는 좀더 오바액션을 하지만 고수들의 요리, 테이블세팅, 촬영 실력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와 이모티콘을 남발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운 것은 내가 그렇게 리액션의 흔적을 남기고 다녔더니 그들도 나에게 와서 감탄하고 표현하더라는 것이다. 반응의 선순환. 반응은 또 다른 반응을 낳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이 일상화된 세상,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웬만한 것에는 시큰둥한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그 시큰둥함은 비생산적이다.
듣는 사람의 시큰둥함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는 내용을 충분히 취하지 못하게 하므로 시간 낭비이고, 반응의 연쇄 작용을 통해 더 큰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확대 재생산의 기회도 박탈한다.
반면 큰 리소스가 드는 것도 아닌 리액션은 효율적이다. 리액션을 위해 필요한 건 경청과 약간의 바디 랭귀지, 여기에 질문까지 하면 '아이고 할아버지~'일 정도로 간단하다.
반면, 간단하기 그지 없는 리액션은 첫번째 도미노와 같은 파급력을 갖는다. 질문하라고 해도 아무도 안 하다가 한 명이 질문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질문이 쏟아지는 상황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회의든, 발표든, SNS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참여자로서 하나라도 더 얻어가는 길이다.팔짱끼고 눈팅만 한 사람보다 고개 한번이라도 더 끄덕이고 박수치고 질문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를 최소한 더 잘 기억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