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는 직장 생활 동안, 회사 밖에 몰랐던 사람이 창업을 하고 투잡이란 것을 하게 되면서 마흔여섯 나이에 비로소 알게 된 것들, 하게 된 생각들을 스스로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몹쓸 기억력의 소유자이기에, 이렇게라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지금의 떨림과 설렘과 두려움을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넷플릭스에서 자꾸 보라고 한다며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해서 나도 따라 봤다.
본방 당시 몇 편 보다가 이선균 형에게 감정 과몰입 되는 게 싫어서 멈췄더랬는데, 이선균이 상무 됐다는 장면에서 고두심이 '됐대? 잘했다 잘했어' 되뇌이며 하는 몸짓과 표정을 보고 그만 또 너무 몰입이 되고 말았다.
아들이 상무됐단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현실 표정
부모에게 자식이 임원이 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가족과 지인들이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하는 건, 단지 타이틀을 얻어서는 아닐 터.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당사자가 겪었을 온갖 역경을 알기에, 쉽지 않은 그 자리에 기어코 오른 것을 축하하는 것이겠지.
한 때 '너무 작은 회사 말고 남들이 좀 아는 회사에서 임원되기'가 꿈이었던 나로서는 이 대목에서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나가겠다고 했고, 언제가 퇴사의 적기일지를 고민하는 이 상황에서도 '혹시라도 회사에서 조만간 임원 제안을 하면 갈등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고 있을 정도로 꿈의 잔상은 끔찍히도 길다.
이선균이 동네 잔치까지 벌린 상무씩이나 달고도 혼자 밥 먹다 울고, 그러다가 결국 나와서 자기 회사 차린 것 처럼, 임원이 된다는 건 어쩌면 나 자신 보다는 주변인, 특히 가족, 그 중에서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소재인가.
흔하지 않은 여자 임원 되면 멋있겠다고,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딱히 임원을 목표로 달리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나를 봐 온 사람들은 되려 '임원이 목표인 사람이 그렇게 살아?' 라고 반문할 거다. 윗 사람마다 맞추려고 노력은 했지만 이놈의 뻣뻣함은 개도 못 주는 고질병 수준. 그저 하던 대로 내 할 몫 하다 보면 좀 늦더라도 차근차근 올라가겠지, 그러다가 임원도 되는 거겠지. 내가 이렇다. 이렇게 순진하고 철딱서니 없고 또 뻔뻔하다.
한 눈 안 팔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던 기간이 내 경우엔 딱 20년차 까지 였다. 그 때까진 어느 정도 내 예상대로 굴러갔었다. 조직이 막 커질 때는 생각도 안 했는데 승진 소식을 듣기도 했다. 업무 특성 상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시기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겠다고 위로하고 격려금 조의 보너스를 받은 적도 있다. 한 마디로 그 때까진 운이 좋았다.
아마도 그 운이 20년차가 됐을 때 쯤 다 했나보다. 그 즈음에 나는 신규 사업을 하는 부서로 이동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10년 가까이 마케팅만 했으니 바꿔 보고 싶어서. 이면의 이유인즉슨, 실장 임용에서 탈락해(드라마에서처럼 공식 심사 같은 건 없었기에 공식 탈락한 것도 아니지만 정황상 그렇다) 같이 팀장이다가 실장으로 영전한 동갑내기를 피해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리 말한 적 없어도 그런 일은 있었다. 세상에는 누구도 정의하지 않은 채 벌어지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지나 놓고 보니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다.
신규사업을 한다는 게 진척은 더디고 조그만 걸로 의미부여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게 일상인데, 피어(Peer)들이라고 하나같이 물어뜯고 자기 내세우기에 급급한 인간들, 바로 위 실장은 나보다 더 물러터진 보살, 그 위 보스는 니들같은 철부지를 데리고 일은 내가 다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임원 중 기피 대상 1순위의 인물.
상황에 밀린 거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론 나이들어 안 해 본 거 배워보겠다고 손 들고 옮긴 거니 쪽팔리지는 않아도 되고, 그 동안 내가 겪은 산전수전도 꽤 되니 그 경험으로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나, 이런 환경은 또 살다살다 처음, 알 만한 사람들은 그 조합으로 모이기도 힘들다고 혀를 찰 정도였다.
전에 동갑내기를 팀원으로 두고 팀장 할 때 그 팀원이 깽판치는 걸 알던 사람들이 나를 위로할라치면, '어려운 환경도 환경이야' 라고 건방을 떨던, 그 호기로움으로 못 할 게 없다고 자만했던 나의 일패.
그렇게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 임원이고 뭐고 다 부질없어져 버렸다. 신사업의 또 다른 특성이 형체 없는 걸 형상화해야 되는 건데, 그걸 간단한 대화도 안 통하는 인간들이랑 3년을 하다 보니 이젠 회의에 들어가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해탈한 심정이 되고, 조직에서 더 올라가고 임원되면 명쾌하게 딸깍 해결되는 일 보다 머리를 쥐어짜도 차선책 밖에 못 찾는 상황이 몇 배는 더 많아질텐데, 몇 배를 더 받는다 해도 기껏 차선책이나 찾으려 뇌즙을 짜며 그 숱한 스트레스를 견디고 싶지가 않았다.
적어 놓고 보니 내가 봐도 골머리 앓아서 좋은 서비스 만들 수도 있는데 왜 그리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냔 소리가 나올 법 하다. 내 안의 긍정 세포가 몇 마리 안 남아 있던 시기이니 이해해 주시길.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잘난 돈 몇 푼에 삶이 이렇게 피폐해져서 되겠냐는 배부른 생각에 젖어 있을 때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내 사업을 하게 되면서 접하게 되는 많은 컨텐츠들은 직장에 매이지 않고도 그 만큼의 벌이가, 심지어 그 보다 많은 벌이가 얼마든지 가능함을 간증한다. 자고로, 지금처럼 조직에 속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고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버는, 시스템만 잘 갖추어 놓으면 저절로 굴러가는 '시스템 수입'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는 시대도 없을 것이다.
보고 듣는 게 이렇다 보니, '남의 돈 내 주머니로 옮기기가 어디 쉽냐, 더럽고 치사한 꼴 참고 자리 지키고 있으니 이 정도 받으며 다니는 거지. 그나마 이 정도 빡센 직장에 감사해야지' 라며 자조하던 나도 '남들이라고 다 경제적 자유 찾는다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냐' 라는 평생 안 하던 마인드셋을 가지게 된 거다. '하루 10시간씩 열심히 해서 위로 올라가면 하루 12시간 일하는 CEO가 될 뿐'이라는 팀 페리스의 말에 '마저마저'를 되뇌이며...
달성할 수 없어 보이는 목표를 앞에 두고 '저거 해 봤자 별로일거야' 라며, 신포도일거라고 포기해 버리는 우를 범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고 그 상황에 직접 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인데 해 보지도 않고, 그것도 바로 눈 앞에서 포기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을 영위하는 데 있어, 내 의지와 내 행동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타인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일만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나 하기 나름인 선택지도 하나쯤 갖고 있는 게 내 인생의 주관자로서 보편타당한 권리이지 않겠나, 이 정도를 바라고 또 도모하는 게 엄청난 욕심이고 도발이냐고 자문을 하게 된단 말이다.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도, 훌륭한 선배들처럼 임원이 되고 C레벨이 되면서 내 머리도 더 팡팡 돌아서 한결 결정이 쉬워지고 간단명료해질 수가 있다면 계속 임원되는 걸 꿈으로, 목표로 하고 싶다. 혹시 그런 분 계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부디 한수 가르쳐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