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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4. 2020

잡문10

[이런 나라]


-Prolog-

자한당은 앞으로 정권 탈취를 위해 북에 돈 주면서 포좀 쏴달라고 빌빌거릴 필요가 없다. 그들에겐 더 손쉬운 방법이 있다.


1. 스웨덴 총선에서 '신나치 운동'에 뿌리를 둔 극우 스웨덴민주당이 17.6%를 얻어 제3당이 되었고, 전체 349석의 하원 의석 가운데 63석을 차지할 예정이다.


2. 우째 이런 일이?


3. 얼마전 스웨덴 영화 <더 스퀘어>를 볼 때 전혀 몰랐던 사실이 있다. 인구가 1,000만여명인 스웨덴은 2015년 16만3천여명의 난민을 수용하는 등 2012년 이후 40만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하였다. <더 스퀘어>의 전편에 깔려 있는 난민 문제 코드를 다시 읽어야 겠다.(난민은 당당하고 스웨덴 중산층은 허둥댄다.)


4. 스웨덴은 2012년 이후 해마다 [인구 60~100명당 1명]의 난민을 수용했다.


5. 유럽과 달리 난민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이 없는 동아시아의 한 OECD 국가는 단 581명의 난민 신청으로 나라가 시끄러워지고 꼴통 기독교와 극우세력이 때를 만난듯이 준동한다.


6. 이 나라는 24년간 [인구 21,774명 당 1명] 꼴로 난민인정자+인도적체류자를 받았다. (인도적 체류자의 비중이 훨씬 크다.)


7. 이 나라의 극우 정서(꼴통 기독교 + 권력으로 돈벌이 하는 무한 탐욕주의자 + 민족순혈주의자)로 볼 때 대선을 앞두고 큰 배 한척에 아랍 난민을 싣고 오면 극우세력이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8. 빌어먹을 나라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 일]


부동산 시장이 죽어서 경기가 침체됐다,

고 하다가

부동산 가격이 뛰어서 살기 힘들다,

라고 했다가

나같은 찌질족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돈이 남아돌아 어찌할 바 몰라

싸들고서 떼지어다니는 투기군상이 얼마나 되는지...

50만 명? 1백만 명?

주변에도 좀 있을꺼라 생각되는데

그렇게 남아돌면

해외여행 다니며 돈지랄이나 하라고

충고하고 싶지만

들어처먹을리가 만무하고

이 군상들의 사회 경제 질서 교란은

결코 쉬거나 물러설리 없으니

그냥 한 숨 한번 찌질하게 쉬고 만다.


내가 한 일이라곤

바둑 TV를 더이상 안본다는 것뿐이다.


이 쌩뚱맞은 이야기가 뭔고하니

애청하는 바둑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바둑 상황을 보다가

"한쪽에 크게 집을 지었으니

이걸로 충분하겠네요.

요즘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알짜 부동산 하나 잡고 있는게

돈 안되는 거 여럿 가진 것보다 좋다고."


그 순간 이 진행자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두뇌게임이요, 그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해 전술과 전략뿐이 아니라, 심리와 철학까지도 결합하여 펼쳐지는 바둑 승부를, 부동산 투자를 위한 땅따먹기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호되게 충격을 먹고 정내미가 많이 떨어졌다.

그후부터 나는 바둑TV를 안본다.

찌질족의 위대한 결단이다.



책을 읽으면 큰일날 줄 알았다.

어쩌면 굶어죽을 꺼라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책을 꺼내들면, 

그럴 여유가 있냐고 온몸이 옥죄어왔다.


두 달 전 겁도 없이 독서모임을 시작할 때까지도 그랬다.


뻔질나게 서점을 가서 책 사던 버릇이 

언제쯤 끝났는지 기억이 안난다.

제대로 책 한 권을 읽은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 지도 가물가물하다.

4년전쯤 수 천 권의 책을 싹 버린 것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벌써 두 달 넘게 독서모임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한 주에 2백쪽 정도 읽어 나간다.


아직 살아있다.

아무리 인생이 고달퍼도 

책은 계속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국과 지옥]


예전엔 교사들이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 뺀들뺀들하게 잘 다듬은 박달나무는 학생들의 손바닥과 머리통을 청량한 음색과 함께 아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 준비된 무기가 없으면 즉석에서 무기를 조달했다. 즉석무기 대걸레자루로 허벅지와 엉덩이를 공격했는데 종종 검붉은 피멍이 오래도록 남겨졌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교사는 싸대기를 날렸는데 이게 가장 다이내믹하다. 정확히 조준을 하면 퍽퍽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쓰레빠로 싸대기 날리는 것은 좀 치사한 것이라서 말하고 싶지 않다.)


와, 정말 지옥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때가 지금과 비교한다면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하는 무시무시한 학대가 완전히 보편화된 오늘의 사회가 진짜 지옥이다. 초등학생을 밤 10시까지 붙들고 공부시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100% 아동학대다.


이게 지옥이다.


부모가 뜻이 있거나 마음이 약해 학대를 하지 못하면 여지 없이 그 학생은 낙오자가 된다. 부모가 아동 학대에 성공하면 마침내 지적으로는 통조림 같은 고학력자를 만들어 낸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자라나기는 하는 것인지 매우 의구심이 든다.


글을 쓸 땐 늘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데 한번 써 온 글을 읽은 후 1/2로 줄이라고 한다. 투덜거리는 아들이 다시 끙끙 거리며 글을 써오면 아버지는 다시 그 글을 1/2로 줄이라고 한다. 빨리 냇가에 나가 낚시를 하고 싶은 아들은 또 열심히 글을 고쳐 쓴다. 그렇게 아들의 글을 받아든 아버지는 만족해 한다.


이게 왜 떠오르는지는 짐작하시겠지만 글을 쓸 때는 가능한 탱글탱글 하게 만들어 작은 여백에 쏙 넣어야 하고 사족은 가차없이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20줄 이내에 자기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이게 가장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다.


인생도 이처럼 너저분한 걸 다 지우고 엑기스로 줄여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나의 책읽기는 다 똥이 되었나?]


차곡차곡 뇌에 잘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 조리있게 끄집어내는 사람은 참 부럽다. 어떤 사람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지식을 담아두고 술술 실타래처럼 풀어헤친다.


나의 뇌는 컴퓨터로 치면 하드디스크가 없는 듯 책에서 얻은 지식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남보다 책을 덜 읽은 편도 아닌데 기억장치의 고장은 거의 장애 수준이다.


물론 완전히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다. 간혹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남들처럼 세련된 데이타베이스가 아니라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의식 속에 틀어박히는 걸까? 아니면 삼킨 지식은 일부 필요한 것만 소화되어 피와 살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대부분 똥으로 배설되는 것일까?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은 CPU와 램이 아직은 제법 쓸만하기 때문이다. 단기간 지식을 습득해서 잘 주물러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런데로 경쟁력이 있다.


요즘 필요에 의해 특정한 역사 토픽을 집중적으로 습득했다. 이것이 시간이 좀 지나면 모두 똥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다. 지식이 무의식에 남는다는 것은 헛소리고, 피와 살이 된다는 것도 가당치 않다. 하드디스크 없는 컴퓨터처럼 재부팅하면 그냥 사라질 뿐이란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나의 뇌는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민주주의는 정말 신비롭다.


격렬하게 대립되던 의견도 단 1표 차이로 결정이 되면 어쨋건 따르게 된다. 여기에 토 달면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덧씌움까지 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비로운" 이유는 역겹고 악질적인 경제적 불평등 사회에서도 그것이 버젓이 제법 작동하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개인주의의 함정]


개인주의의 한 극좌표에는 누구도 나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다는 불가침의 권리가 있고,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다른 '인권'만큼이나 신성한 지위를 가진다.


그런데 모든 권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가 따라오듯이 이 권리를 보호받고 행사하려면 사생활 영역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충분한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역은 누구도 알 수 없고, 누구도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현대사회는 사생활을 온전히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복잡하고, 불가해한 삶의 생태계 속으로 (결코 완전하지 못한) 개개인을 내몬다. 그 결과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개인이 어떤 도움을 청할 때면 현대사회는 '개인주의'의 이상 뒤로 비겁하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숨어버린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해법도 없고, 윤리적인 해법도 없고, 법적인 해법도 없다. 내가 개인주의를 배반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주의가 나를 배신한 것인지조차 분별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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