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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4. 2020

행복한 노동이 가능하다고
교과서에서 가르치나?

일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면 그건 "기적"이다.


주변에 전문직 친구들이 좀 있고 꽤나 여유 있게 산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노동에 학을 띤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아니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몹쓸 행태에 빠진다. 만약 자신에게 붙여지는 그럴싸한 직업적 신분적 호칭이 마음에 들어 그걸 광내고 때 빼면서 사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다면 그건 가장 건전한 방법으로 타협한 것이다. 좀 속물처럼 보이는 것만 뺀다면 그렇게 파괴적이지 않다.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사회에게도 심각한 해를 끼치지 않는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그 노동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고백할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그는 삶의 변두리에 놓인 것이 아니라 삶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고통이고, 거짓이고, 때론 범죄이기도 하다. 그런 현장에서 삶의 행복과 희망과 미래를 보도록 하는 뇌수술이 매일매일 집도된다.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뇌는 들추어지고 조작된다.


여기서 벗어난다고 '설국열차'처럼 그 결과가 단순해지지는 않다. 그 앞에도 수많은 선택이 놓여있고 무엇이 "행복한 노동"을 가져다줄지 찾아가다가 결국엔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에 귀착하게 한다.


나는 나의 일이 행복하다. 보람도 있다. 일의 결과물을 받은 사람들이 행복해하거나 만족스러워하고 그래서 결국 그 일이 잘 풀리게 되면 나는 그것만으로 너무 기분이 좋다. 


나는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콘텐츠"일 때 일을 함께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부분에 대해 "전적인 판단권을 가져야" 일을 한다. 까다롭다. 하지만 나에게 온 일은 그 결과물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도 정직하고 만족할만한 결과는 된다. 그래서 서로 행복할 것 같은가? 미안하게도 이런 일은 보수가 매우 적다.


"갑질 없는 곳에는 값도 없다."


결국 이런 것이다. 나는 나의 노동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노동력을 싸게 판다. 이 절대적 모순이 자본주의에서는 그저 우습게 보일 뿐이다. "노동가치를 지킨다"는 제법 멋진 표현의 대가는 매우 혹독하다. 늘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그래도 아직 '선택'을 한다는 자존심이 있기에 살아나간다. 돈은 꽤나 잘 벌면서 삶은 (나의 기준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우쭐한다. 이게 홍상수식 속물근성이라 말할지 모르겠다.


내 맘에 들게 결과물을 만들고 관계자들도 흡족해하고 그래서 통상적인 갑을관계 악다구니에서 거래되는 금액의 1/5~1/3을 받으면 작고 씁쓸한 행복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걸로 먹고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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