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1.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사운드트랙을 찾아서 듣는 것은 잘 안하는 짓이다. 하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자니 그린우드 음악이 손을 맞춘 영화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의 <팬텀 스래드>뿐만 아니라 <데어 윌 비 블러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음악은 영화만큼이나 신경을 곤두세운다. 달달한 음악이 아니다. 포레, 드뷔시, 슈베르트, 브람스, 베를리오즈를 절묘하게 섞어넣었지만 그린우드의 오리지날 곡들이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만큼 영화음악에 심혈을 기울이는 감독이 흔치는 않을 듯하다. 이 음악이 아니었으면 과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그 압도적인 표정에 그만한 생명력이 담겨질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2.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엔딩 크레딧이 끝날쯤엔 나 혼자 덩그러니 남고 직원이 "저 사람은 왜 안나가나?"하고 흘끗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제 밤 더숲에서 <팬텀 스레드>가 마지막으로 상영되었다. 어쩌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몰라 잽싸게 한 자리 차지했다. 10여 명의 관객이 있었고 중년에서 2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극장불이 환하게 켜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꼼짝 하지 않았다. 더숲의 영화 문화다. 아니 더숲을 찾는 관객들의 관람 문화다. 물론 여기엔 <팬텀 스레드>의 무게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팬텀 스레드>의 안쪽을 건드려보는 것은 감히 엄두가 안난다. 물론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비하면 도리어 단순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랑하면 나약해진다.
이 만고의 진리를 영화는 잔인하게 비튼다.
나약해지면 사랑한다로.
하지만 여기까지라면 그리 유별난 것도 아니다.
한 걸음 더 나간다.
사랑하기 위해 나약하게 만든다.
그렇게 인위적인 사랑을 만든다.
어쩌면 흔한 캐릭터인 레이놀드에 비해
알마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래서 알마에 대한 이해나 분석을 놓고 오만가지 평론이 갈린다.
몰론 이것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력이다. 그가 창출하는 인물은 기존의 시각으로 쉽게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어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영화 제목이 왜 '팬텀 스레드'일까?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뭐 '유령' 어쩌구겠구나 생각할테지만 이건 우리 말로 하면 '천의무봉'에 해당한다. 솔기 없는 완벽한 바느질 말이다. 레이놀드가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며 자기가 만든 옷을 바라볼 때 그는 천의무봉을 추구하리라. 그래서 팬텀 스레드일까?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팬텀 스레드는 알마가 레이놀드의 삶에 침투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삶의 솔기 없는 마감질을 뜻한다. 그것에 대한 가치평가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4.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그러한 인위적인 삶의 평안한 균형을 숙고해 볼만하다. 어쩌면 그린우드의 음악이 그 해답으로 인도해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