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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5. 2020

잡문14

거짓말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거짓인줄 알고 하는 거짓말.

다른 하나는 거짓인줄 모르고 하는 거짓말.


흔히 전자가 더 나쁘다고 착각하기 쉽다.

실제론 후자가 백만배 더 고약하다.


자각한 거짓말에는 이성이 작동하고

따라서 죄의식 비스무레 한게 깔린다.

자각 못하는 거짓말은 보통 추한 욕망에 압도되어

이성조차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들은 거짓말 하고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해악은 훨씬 파괴적이다.

그리고 그런 비자각적 거짓말은 

그것을 통해 능히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힘 있는 인간들이 주로 하게 마련이다.


살면서 종종 마주친다.


[절제의 미덕]


한국의 각종 TV 퀴즈"쇼"와는 달리, 20분 내에 61개의 퀴즈 문제를 스피디하게 풀어가는, 50년 넘는 역사에 30년 넘게 같은 진행자가 이끄는(송해보다 길게!) 일주일에 5번 평일 방송을 하는 프로그램. Jeopardy!

오래전부터 시청을 하고 싶었지만 국내에서는 쉽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유튜브 덕분에 요즘 매일 밤 잠자기 전에 한두회분을 보게 되었다.(영어공부에도 좋고 상식의 폭을 넓히는 데도 안성맞춤)


그런데 가장 감탄하게 되는 것은 반세기 넘게 거의 포맷을 바꾸지 않고 하나의 프로그램을 쌓아나가는 이들의 방송 "철학"이다.


오늘은 작년 5월에 방송된 특집 프로그램을 보았다. 미국인이면 누구나 익숙하게 알만한 방송 리포터, CNN 아나운서, 그리고 방송작가겸 코미디언이 상금을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후원금으로 내기로 하고 겨루는 이 특집 편성은 워싱턴 DC에서 수천명의 관객을 모아놓고 진행하였다.


대단한 이벤트 아닌가? 온갖 과장과 겉치레로 장식할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얄짜리가 없다. 세 명의 스타 출연자들은 자신들의 명성에 걸맞게 끊임없이 깝쭉대려고 하고 시종 추임새와 너스레를 넣고는 하지만 진행자는 이를 탁탁 쳐내며 스타가 아니라 평민이 출연했을 때와 똑같이 빈틈없이 진행했다. 광고시간 빼고 20분만에 칼같이 끝내버리고 어떤 사족도 없다.


실 콘텐츠 10분에 부왕떨기 50분으로 구성되는 이곳의 TV 프로그램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내 안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고 칠 때

누구 힘이 더 쎈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악마를 직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그 놈은 통제 가능한 욕망이지만

그 놈을 직시하지 못하면 그 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간혹 사려 깊고, 정의롭고, 공감능력 있고, 성찰적이기도 한 사람의 입에서 "위대한 민족"이라는 말이 툭 튀어 나오는 경우를 본다.

그럴 때마다 왜 그 사람의 머릿속에 저런 종교같은 신념이 뿌리 깊게 자리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곤 한다.


[나의 발견, 나라의 발견]


광화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들렀다.

1961년부터 현재까지를 다룬 제3,4전시실을 보았다.

생각보다 꽤 잘 만들었다.

청계천 마찌꼬바의 방을 재현해 놓은 것은 감격이기도 했다.

나는 61년 생이다.

이곳을 다 둘러보고 나니 드는 생각은

"내가 바로 역사가 되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몸 잘 간수해야겠다.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67년만의 귀향'이란 제목으로

한국전쟁 시 참전하여 죽은 군인의 시신발굴 관련 전시였다.

충격이었다.

약 16만 명의 군인(경찰 등 포함) 사망자 중 

2만 9천 명만이 유해가 수습되었단다.

그동안 나머지는 유해도 없었던 것이다.

이게 다른 나라에서도 정상적인 수치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전쟁 직후 이승만은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바리들이 정권을 잡은 기간에도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이런 조까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

목숨을 내걸만한 나라를 먼저 만들어라.

('유해발굴감식단'이 만들어져 약 1만구의 유해를 찾아냈다고 하는데 이 기구가 국방부에 만들어진 것은 노무현 때인 2007년이다.)


[몸이 기억하다]


8년전 오늘이었나?

밤 10시쯤 차를 몰고 여의도에서 출발했다.

약 5시간 달려 상가집에 도착했다.

새벽 3-4시쯤 여전히 아주 길게 늘어선 조문객들 틈에 줄을 섰다.

어느덧 멀리서 하늘이 밝아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차를 몰고 5시간을 달려왔다.

내가 왜 거기까지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나는 그 시간에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마음이 어땠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더라도 표현하기 힘들다.

굳이 표현하려고 노력해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밤새 10시간을 오고가며 운전했던

나의 몸은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다.

(2017.5.24)


첨에 난 그냥 그 말이 재치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이 비판할 때도 그냥 귀엽게 봐줄 수 있는 말이라 넘겼다.

"진보어용지식인"이란 조어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이 가진 선동 효과를 보면서 아연해 하고 있다.

이 말은 결코 순발력으로 나온 말이 아니다.

매우 고심 끝에 만들어낸 조어이다.

그냥 속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에게 이 말은 그동안 고심하던 문제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보편적 정당성'의 문제와 '(스스로 생각하는 진보적) 실천' 사이의 메우기 힘든 간극을 간단하게 해결해 준 것이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도 민주주의의 보편성에 대해 민감하던 사람들이 그 민주주의의 가장 소중한 유산의 하나인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과감하게 '어용성'을 주문하는 모습까지 목격하게 된 것이다.

진보어용지식인!

이 말이 가진 선동 효과가 대단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가 여전히 매우 유능한 사람이며 그 유능함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런 고약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2017.5.17)


[호칭, 위계문화의 출발점}


난 호칭에 민감하다.

이름 뒤에는 어떠한 호칭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다.

(물론 가까운 사람의 경우 또는 2인칭 대화의 경우에는 우리말의 특성상 '씨'나 '님'을 붙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름만 불러야 한다고 본다.

이름만으로 충분치 않을 경우 그 사람의 '직책'을 이름 앞에 붙여야 한다.

"대통령 문제인은..."

"대통령 문재인의 부인 김정숙은..."

이렇게 말이다.


참고로 대통령의 부인에 대해서

경향신문은 시종일관 '여사'를 붙였고

(간혹 기사에 따라 '씨'도 있음)

한겨레신문은 시종일관 '씨'를 붙였다

(간혹 기사에 따라 '여사'도 있음).


만약 이름 뒤에 호칭을 붙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냐면

이순자 여사

전두환 전대통령

안철수 의원

김미경 교수

이OO 박사

박OO 변호사

....


이렇게 되다가

이도저도 아니면 갑자기

이용수 할머니

김모 학생

....


요렇게 희한하게 된다.


이러다가

아무 것도 아니어서 애매하거나

어디 낑겨 넣을 곳이 없는

한마디로 별볼 일 없는 인간에 이르르면

이규성 씨

허학범 씨...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언론이 사용하는 호칭법이다.

한마디로 좃같은 것이다.

차별과 위계문화의 출발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나도 아주 단호하다.


[얍삽한 양비론]


1.

소위 진보언론이 문재인을 만만하게 본다며 문재인 지지자들이 난장판을 만드는 것은 노무현 때의 기시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진화된 온라인 소통 기능으로 인해 더욱 팽창되었을 뿐이다. 그 행태는 다른 여타의 지지자들이나 사안별로 보여주는 온라인 집단 행동(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의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나는 진보언론에 몸 담고 있는 언론인 중에 권위주의의 후퇴 또는 해체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그동안 뒷걸음치거나 숨겨놓았던 비판적 언론인의 근성을 (기회주의적으로) 회복한 사람들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그 자체가 언론과 사회의 발전이라고 보며 격려하고 칭찬하고 싶지만, 이러한 모습에 배알이 꼴려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만약 그런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언론인이 있다면 기꺼이 나도 한마디는 하고 싶다. 좀만한 쉐뀌.


3.

나는 현 상황이 심각한 수준으로 과열되어 있다고 보지 않지만 이 문제의 근원은 생각보다 아주 심각하다고 본다. 그것은 정치적인 지지나 애정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으며 결코 쉽게 무마될 수 없는 '죽음'이 칼처럼 폐부를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그 현실은, 그 기억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싸안고가야할 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이 비극이 이성적인 대화나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다. 또 하나의 비극이 잉태된다.


4.

이 문제에 대해 대응하는 분들의 성향을 가만히 보면 결국은 노-문의 정치노선에 대한 전폭적 지지와 비판적 지지(혹은 비판)의 간격을 그대로 노출한다. 다시 말해서 '정당성'의 싸움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노선'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정치적 대결에 공통적인 것이다.

(2017.5.16)


내가 얼마나 물렁물렁하고 줏대 없는 스폰지 타입인가 하면, 사리분별 부족한 감정적 과잉 집단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런 행위를 잉태한 역사적 사회적 집단체험이 허구인가, 아니면 그 그 집단의 느낌이나 생각을 그렇게 고착시킬만한 객관적 실체가 존재하는가를 파단해보고, 만약 그것이 '체험-감성-행동'으로 연결되는 강력한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 행동이 과잉이며 부정적이고 때론 패악스런 단계가 되더라도 스폰지처럼 쑥 흡수하는 편이다.


어느 조직이든

다수파를 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패권주의'니 뭐니 비스므레한 말들로

비판받고, 견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소수파는 그런 비판과 견제가

혹여 지랄이나 발광에 이르지 않도록 유의할 일이다.

지난 시기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반면교사 삼아

많은 걸 깨닫게 된다.

게다가 진행형이다.


[막 쓰는 글]


한때 자녀에 대한 집착은 

교육열을 높혀 이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재는 분명 역작용을 하고 있다.

각종 교육문제를 다 파생시키고

그로인한 양육 압박으로 가파른 출생률 저하를 가져온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 거덜나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런대도 뽀족한 해법이 없다.


나는 국가가 양육을 지원하는 각종 제도적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대대적인 의식개혁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얼마나 퇴행적인 인생관인가 하는 것을

대대적으로 프로파간다하는 것이다.

이 나라 특성상 10년만 하면 확 바뀐다.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사시눈 뜨도록 의식개혁하는데 5년도 안걸렸다.)


근데 이 글이 완전 '막 쓰는 글'인 이유는

자녀에게는 '무한한 사랑'이 필요하고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사랑'과 '지나친 집착'의 구분은

인간종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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