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을 보았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준 봉준호의 예리함과 치열함과 깔끔함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 실망이었다. 일단,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준 집요한 노력이 <괴물>에서는 사라졌다. 어딘지 모르게 서둘러 봉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뭔가 어색한 장면 설정이나 스토리 연결을 그대로 방치한 채 작품을 내놓은 것 같았다.
<괴물>에서는 서로 조응하지 않는 3개의 영화 속 공간이 병치되어 있다. 그래서 어색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가족의 사투'의 공간이 그중 하나의 공간이다. 이것은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공간이고 철저히 리얼리즘적 접근으로 카메라가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봉준호의 장점이듯이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물론 <살인의 추억>의 짝퉁 나이키 신발과 같은 예리함을 간직한 장면들이 다소 둔화된 느낌이지만...
또 하나의 공간은 이 리얼한 현실과 괴물이 부딪치는 공간이다. 편하게 말하면 SF 공간이다. 여기서 영화는 약간 갈팡질팡한다. 꼬리찍기나 활쏘기, 석유먹이기 등은 일종의 코믹적 접근이다. 용가리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실제 작품이 괴물에게 부여하고 싶었던 캐릭터는 그것이 아니었다. 괴물은 <에이리언>과 같이 절대적 대립자의 역할이었다. 거기에는 별로 설명이 필요 없다. 왜 인간을 먹는지? 그런 설명이 필요 없는 그저 절대적인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실제 그 괴물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에서 갑자기 괴물이 '코믹'한 연기를 하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을 다 노출시킨듯하면서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은 그 빈틈없는 일관성이 <괴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마지막 공간은 상징적 공간이다. 이 영화는 사실 노골적인 '반미' 영화다. 그러한 정치적 함의를 이런 류의 영화 속에 담으려면 상징적(이 말이 적당한 어휘는 아니지만 그냥 '상징적'이라고 해두자) 접근을 해야 한다. 물론 포르말린과 사팔뜨기 의사의 장면은 그 자체로서 아주 효과적으로 잘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장면들과 연결되면서 그러한 상징성이 허물어지고 어색함으로 변모하고 만다.
미국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중동에 후세인이란 괴물을 키웠다. 때론 세계의 파수꾼 인양 '먼지' 하나도 용납 못한다는 듯한 허울을 과시하며 온갖 포르말린을 세계에 난사하면서 그렇게 '괴물'을 양산했다. 그리고 그 괴물이 만들었다는 '바이러스'로 등치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몰고 와서는 때론 조작을 통해, 때론 잔인성으로 통해 그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려고 했지만 '쪽팔리게도'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바이러스의 존재는 misinformation이라고 인정한다.
<괴물>은 부시의 미국이 보여준 이러한 전형적인 행태를 폭로하는 반미영화였지만 그러한 상징의 공간의 직접적인 현실 공간과 접목되면서 어설픔을 노출시킨다. 포르말린과 사팔뜨기 의사 장면과 같은 짜임새가 다리 밑의 공간에서는 허술하기 그지없다. 거기에 반미시위대까지 '직접' 등장을 하니 마지막 다리 밑의 사투 공간은 그야말로 서로 결합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뭉뚱그려진 잡탕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신선했던 것은 괴물의 애크로뱃 묘기이다. 한강 다리 밑의 철물구조를 곡예로 움직이는 괴물의 모습은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의 하나이다. 헐리웃의 수많은 괴물 중에서 이처럼 애크로뱃을 선보인 괴물은 없었다. 그리고 가장 봉준호 다운 장면은 하수구이다.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렇듯이 하수구에 강한가보다. 봉준호의 재능이 <괴물>에서 다소 흐트러진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욕심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도 없고 '반미'도 없이 <에이리언>처럼 그리고 박찬욱의 영화처럼 단순 무식한 주제로만 접근했다면 <괴물>도 훨씬 깔끔하게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화감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한 무리한 욕심이 있기에 봉준호가 박찬욱보다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