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사색
인간은 모든 것의 중심이란 생각. 그래서 인간은 다른 모든 것과 다르다는 생각.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하나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유지되어온 관념이다.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생각. 따라서 다른 보편적인 원리와 구별되며 그 상위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설 자리를 잃었다. 인간은 그저 광대한 우주적 원리, 물리적 화학적 보편적 원리가 적용되는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엇인가 특별한 존재로 자기를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다윈의 진화론 이후 무너지게 되었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의 연속성상에 존재하며 다른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아무런 불연속적인 심연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후 인간에겐 새로운 차원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서양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가진 무의식의 세계는 해석 불가능한 영역으로 남아 여전히 인간을 몬가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무의식의 세계, 잠재의식의 세계를 인간의 의식세계와 단절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의식세계와 연관된 것으로 프로이트가 해명함으로써 인간에게는 더 이상 다른 존재...다른 질서와의 불연속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은 우주, 자연, 의식세계 등 모든 것과 연속적인 것으로 해명되고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 보다 본격적으로 화두에 올려지는 또 다른 불연속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기계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비디오 드롬> 이후 사람의 몸과 기계의 연속성, 불연속성, 일탈과 조합 등에 대해서 집요하게 문제제기를 했지만 인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육체에 관한 문제에 가까웠다. 즉, 뭔가 통일적인 문제의식이 아니고 파편적인 생각뿐이었다.
기계가 되고 싶은 인간. 인간이 되고 싶은 기계. 그리고 그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그 불연속성의 본질과 그러한 불연속성에 따른 인간 삶에 대한 재조명. 이것은 리들리 스콧의 1982년도 기념비적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장 극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스필버그의 <A.I.> 스필버그는 우선 이 영화에서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스필버그 특유의 영화철학. 영화는 어린이에서 성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돈을 위해서건 아니면 영화 자체를 위해서건. 스필버그의 그러한 집착은 이 영화에서 약간의 부조화로 드러나고 있다. 이 영화는 스텐리 큐브릭이 만들려고 했었다는 점에서 내용이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다. 즉, 스필버그가 즐겨 쓰는 인간의 행복, 동화적 구성, 그런 것으로 처리하기엔 무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스필버그는 어린이와 성인 모두를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 어린이에겐 고급 피노키오를, 성인에겐 인간과 기계의 불연속성에 대한 <블레이드 러너>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 간격이 너무 멀기 때문에 여기저기 부조화가 눈에 띠고 급기야는 마지막 2000년을 건너뛰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스필버그 최대의 문제작인 <ET>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타이틀 자체도 ET와 AI로 단순하거니와 지금까지 동일한 주제를 다뤄온 다른 영화의 방식을 완전히 거꾸로 세웠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일치한다. ET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외계인이 인간을 지배하거나 파괴하려는 것보다는 외계인은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는 게 문제다"라고. AI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사이보그가 인간을 파괴하려는 것보다는 사이보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데 인간이 사이보그를 적대시하는 게 문제다"라고.
그러나 AI가 동화적 ET와 다른 점은 이러한 것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니란 점이다. 이 영화는 사이보그와 인간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사이보그를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다시 묻는 것이다. 어차피 사이보그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문제는 인간과 기계문명의 관계이다. 인간과 사이보그의 문제는 결코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이보그를 통해서 가장 극명한 방식으로 인간과 기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이 영화가 가장 직접적으로 던지는 주제는 "인간은 기계와 다른가?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가?"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해답은 실제의 영화 스토리 전개와는 다르게 "인간과 기계는 다르다"로 결론을 맺는다. 스토리는 마치 기계가 인간이 되어가는 것으로 설정하지만 이는 피노키오식 동화를 통해 인간의 행복과 사랑을 영화 속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과 기계가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의 감정이나 사랑이라는 피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인간과 기계가 다른 점은 인간의 개체성(즉, 유일성)과 인간의 잠재의식이다. 사이보그는 수없이 복제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보다 2000년 후에 나타날 발전된 생명체도 개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만의 유일성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이보그 주인공 '데이빗'의 피나는 노력. 발전된 생명체가 가지는 '유적 통일성' 그것에 반해서 인간만이 가지는 개체성으로 이 영화는 인간의 본질을 파악한다.
또 한 가지는 잠재의식이다. '사랑'도 프로그램으로 가능하다고 설정한 이 영화는 그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대부분의 이런 류의 영화는 어설프게도 '사랑'이란 추상적인 내용으로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사랑'은 프로그램 될 수 있다. 하지만 '꿈' 즉 보다 구체적으로 뇌에 미묘하게 저장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세계는 결코 프로그램으로 대체할 수가 없다. '데이빗'은 마지막 장면에서 꿈을 꿈으로 해서 인간의 세계로 들어선다. 이는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는 이야기로 패러디하기 위한 그저 해피엔딩을 위한 스토리 설정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외형적인 많은 것들은 차치하고 인간과 기계의 문제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개체성과 잠재의식을 결코 사이보그가 흉내낼 수 없는 것으로 이 영화는 사실상 단정하고 있다. 이 말은 역으로 설명하면 개체성과 잠재의식 이외의 모든 것은 인간과 기계에서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 사랑과 미움. 이런 것까지도 기계와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제 이 영화가 던져준 문제의식에 대해 다시 한 번 반문해야하는 차례이다. "그렇다. 개체성과 잠재의식은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이다. 그 이외엔 기계와 인간의 불연속적인 관계는 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다시 물어야 한다. "그 개체성과 잠재의식은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가? 만약 개체성과 잠재의식을 가진 사이보그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인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는가?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로 파괴해도 되는가?" 뒤의 이야기는 좀 공상과학적인 질문인지라 차치하더라도 "그 개체성과 잠재의식은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가?"라는 문제는 좀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 자체에서는 그리 본질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