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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13. 2020

잡문18

[의심과 비판]


국민은 꿈을 이야기한다.

때론 철없는 꿈일 수도 있다.

지도자는 꿈을 실현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아마도 꿈의 아주 조그만 일부일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꿈의 실현이라고

부푼 희망과 함께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만약 어떤 지도자가

여러분의 꿈을 몽땅 실현시켜주겠다고

큰 소리를 친다면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질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럴 수가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 의심은 국민의 의무이다.


만약 어떤 지도자가

여러분의 꿈은 참 철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은 잘 이해 못하겠지만

제가 제시하는 길로 가야만

그 꿈의 일부라도 이룰 수가 있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국민은 그 지도자를 비판해야 한다.

이것도 국민의 의무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단단히 틀어쥐고

설득력이나 유연성을 통해

반대세력을 중립화하거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외연의 확대"라고 부른다.


자신의 정체성을 희석화하면서

합종과 연횡, 무차별 연대로

반대세력에 아부하는 것은

"내연의 붕괴"라고 부른다.


권총을 한 자루 가지고 있다.

집 근처 야산에 잘 파묻어 두었다.

오늘 아무래도 필요할 듯하여 꺼내오려고 집을 나섰다.

그때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끌려 가면서 드는 생각.


"오늘 재수 되게 좋다.

권총 꺼내오다가 걸렸으면 어쩔뻔 했냐?"


-- 오늘 나의 단잠을 깨운 꿈


[양말과 정치]


양말을 신었는데 꺼꾸로 신은 것 같다.

수고스럽게 벗어서 뒤집어서 신는다.

이런 젠장.

아까가 제대로 신은 거였다.


이런 일은 간혹 정치적 선택에서도 벌어진다.


[나의 옆모습]


고등학교 때 나는 우연히 거울 2개를 들고 있다가

나의 옆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헐~~

참 못생겨서 많이 놀랐다.


나의 '발견'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가까이 지내는 사촌동생에게

자신의 옆모습을 보게 만들었다.

"우~~~와~~워워~~"하고 놀라던 그 실망의 감탄사.


나는 내 앞모습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나의 옆모습, 뒷모습을 훨씬 많이 볼텐데.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앞모습이

'나'라고 생각하는 관성에 빠져든다.

그럴 땐 거울을 2개 들고 옆모습과 뒷모습을 본다.

여전히 참 못생긴 걸 확인하게 되면서도...



소나무처럼 살 수는 없을까?

그냥 내 몸만 비틀면서...


"완전국민경선."

마치 권한을 모든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식 정치는 결국 제발에 도끼를 찍게 된다.


정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건강한 정당의 정착이다.

정당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정치인에 대한 자체 검증이다.


정당이 정치인을 제대로 검증하여

자신들의 대표로 내세우는 시스템이 망가지면

안씨나 반씨처럼 어린이 위인전에 한번 다뤄졌다고

어느 날 갑자기 미디어가 대선 후보로 띄우고

정치문화를 휘져어버리는 사태가 늘 발생한다.


우리나라 같이 정치혐오가 심한 경우는 그 폐악은 더욱 크다.

다행이 이번의 더불어민주당 경선 주자들은

나름대로 정당 구조 내에서 순기능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늘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국식 개방형 정당은

때로 다이내믹한 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우리 같이 정치 혐오가 큰 사회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인사들이 정치를 휘졌는

불행한 사태를 반복하여 만들 것이다.

(2017.1.24)


(2017.1.19)


[60연승 알파고의 교훈]


알파고가 온라인 바둑 사이트에 가명으로 등장해서 박정환, 커제를 비롯한 한중의 최고 고수들을 상대로 파죽의 60연승을 기록했다. 아마도 인류역사에서 알파고를 이긴 단 한 번의 게임은 이세돌과의 4번째 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수십년전까지 세계 바둑을 이끌던 일본에서 바둑은 종종 미학이고, 철학이고, 도였다. 바둑을 배우기 전에 10시간 이상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했다. 조치훈도 그렇게 바둑을 배웠다. 만약 바둑이 그런 거였으면 알파고는 절대로 인간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식 바둑은 파산했다.


그후 한국이 세계 바둑을 이끄는 동안 바둑은 처절한 승부의 세계 그 자체였다. 강렬한 승부욕과 근성, 승리를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과 법칙(정석)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배짱과 용기. 이런 것이 바둑이었다. 그러나 이런 접근도 결국 파산했다.


중국이 세계 바둑을 이끄는 지금 바둑은 철저한 계산과 암기의 영역이 되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수많은 젊은 피들이 달라붙어서 놀라운 수읽기 능력으로 바둑을 제패했다. 그러니 나이가 젊을수록 절대적으로 유리해졌고 20대 중반만 넘어서도 퇴물이 되어갔다. 커제는 이제 19살이다.


이런 과정에서 바둑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졌다. 나는 알파고의 '인공지능'이 바둑을 둔 것인지, 아니면 알파고의 '계산능력'이 바둑을 둔 것인지 잘 모르겠다.(알파고는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알파고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바로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커제와 박정환이 단 한번의 실수도 안하고 바둑을 한 판 둔다면 아마도 그런 바둑은 인간이 둘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바둑, 바둑이라는 게임 자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바둑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의 실수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 그런데 알파고가 등장하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이 아무런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알파고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즉 다시 말해서 인간의 능력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2017.1.18)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칼레를 점령한 영국은 전체 시민을 학살하는 대신 지도자 6명의 목숨을 요구했다. 결국 시의 지도자급 6명은 교수형을 받으러 끌려갔다. 다행히도 영국왕은 임신한 왕비의 간청으로 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 역사인지는 모른다. 전해지는 일화이기 때문이다.)


5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칼레 시는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한 조각가에게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그는 희생정신이 빚나는 당당한 도시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담은 조각상을 기획했다. 하지만 조각가의 죽음과 전쟁의 발발로 계획이 미뤄지다가 45년이 지난 후 다른 조각가인 로댕에 의해 그 유명한 <칼레의 시민들>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로댕이 1889년 완성한 기념상은 사람들이 기대한 애국적 영웅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는 6인의 인물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거나 곧 닥칠 죽음에 침통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인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극히 인간에 가까운 이 모습은 곧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 기념상은 당초 세워질 예정인 칼레 시청이 아니라, 한적한 리슐리외 공원에 세워졌다가 나중에야 다시 칼레 시청 앞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칼레의 시민 [The Burghers of Calais] (두산백과)


게다가 로댕은 자신의 작품이 일반 동상처럼 제단 위에 올려지기를 거부하고 지면 위에 설치되기를 원했다. 결국 로댕의 작품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다. 오늘날 이 조각상은 최고의 조각상의 하나로 평가받지만 처음 이것을 통해 "애국적 영웅상"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몹시 실망하고 낭패해 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칼레의 시민>과 같은 모습을 담았다면 아마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찬탄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외면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일반 시민이나 한국의 일반 시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역사를 정형화된 어떤 상으로 기억하려는 노력은 늘 다양한 시각이나 복잡한 내용을 사상시킬 수밖에 없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나에겐 별 감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순신상은 어떠하며 세종대왕상은 또 어떠한가?


나는 <평화의 소녀상>이 <칼레의 시민들>처럼 표현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토로하는 의견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로댕과 같은 조각가를 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할 이유는 전혀 없다. 동상은 늘 그렇듯이 그냥 동상일 뿐이다. 내가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단 한번도 이순신 동상을 똑바로 바라본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못느끼지만 나는 일본대사관 앞을 지나면 늘 소녀상을 바라보며 많은 상념에 잠긴다. 그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심리는

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반적인 사람의 경우에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려는 욕구가 훨씬 크게 작동한다.


자기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보고나온 영화는

다른 영화보다 일단 좋게 평가하려는 욕구가 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읽은 책은

자기가 읽지 않은 책보다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려고 한다.


이런 욕구는 모든 삶에 영향을 끼친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배우자의 선택이다.

여기서도 남의 떡이 커보인다면 좀 곤란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의 선택을 정당화하려고만 할 때

종종 큰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


30년전쯤엔 당시 인문사회과학 서적이라고 나오는 책들의 2/3은 사들인 것 같고, 그중 2/3 정도는 읽은 것 같다. 좀 무식한 방법이었다.


20년전쯤엔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을 선별해서 사들였다. 소장해야 할 책이라면 일단 사들였다. 그리고 1/3 정도는 읽은 것 같다.


10년전쯤엔 당장 그리고 분명히 읽을 것 같은 책만 샀다. 하지만 대부분 읽지 못하고 책꽂이에 꽂혔다. 읽기 시작한 책도 대부분 중간에 책갈피가 삽입된 채 하염없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2년전 이사를 하면서 소장했던 거의 모든 책을 낫가마로 내다버렸다.

요즘도 나는 서점을 가면 읽고 싶은 책이 눈에 띈다.

몇 번 만지작 거린다.

읽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내가 언제 읽겠냐..."하고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하릴없이 책을 제자리에 놓는다.

나는 이 순간이 너무 싫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쩌면 만지작 거리는 것조차도 안할지도 모르겠다.)


멀쩡하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기 나라 국가 원수 이야기만 나오면

뇌가 마비가 되고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여유있게 세상사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기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근육이 마비되고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이런 류의 발작 증세는 정도를 달리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발견된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가치관이 톡 건드려지면 그렇다.


특히 정당한 논리적인 방어기제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잘 아는 경우"에는

그 발작 증세가 매우 심하게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허위의식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셋팅을 해 놓으면 그런 증세가 심각하게 벌어진다.

또한 그런 가치관을 내려놓을 경우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배척되는 강도가 클 때

그로 인한 두려움 또는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발작을 인위적으로 "과잉 표출"하게 된다.


공중목욕탕에서 한 중노인이 탕 난간 위에 걸터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잘못해서 자빠지면 돌에 머리를 부딛혀 다칠 염려가 있었다. 관리인이 들어와서 내려앉으라고 말했다.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그 중노인은 말대꾸를 하며 신경질을 냈다. 한참을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투덜투덜 욕을 하며 내려 앉았다. 그러고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한참 후에 탈의실쪽을 내다보니 그 아저씨가 수건 하나를 들고 선 채로 또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 분은 평생 동안 얼마나 저런 자세로 졸음을 이겨야 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


정치적으로 매우 날카롭고, 세심하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은 문화적 취향에서는 폭이 좁고, 단순하고, 대중적이고, 때론 키치스러운 경향이 있다.


문화적으로 예민하고, 풍부하고,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사람은 정치적인 주장이 좀 단순하고, 뭉툭하고, 추상적인 경향이 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차 타고 잠시 폰을 들여다보는데

"쿵"

앞차 SUV가 차 빼려 후진 하다가 박았다.

충격 강도로 봤을 때 별 흔적도 없을 듯해서

아무일 없는 듯이 계속 폰만 파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앞 차는 차를 빼서 나갔다.


잠시 후 누가 창을 두드렸다.

"제가 후진하다가 차를 좀 박았는데..."

"아... 괜찮을꺼에요."

그리고 아직도 나는 차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아마 내가 다른 차를 박았다면 솔찮게 물어줬겠지.


내 생각에 자동차 교육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범퍼의 용도이다.

범퍼는 부딛혔을 때 충격을 막아주는게 자기 역할이다.

즉 부딛히라고 만든 것이다.

기스좀 났다며 돈 뜯어내라고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20년전 쯤.

오늘 처럼 차를 세워뒀는데 뒤에서 박았다.

고개가 꺽이고 충격이 엄청났다.

트렁크쪽은 아예 박살났으리라 생각했다.

깜짝 놀라 나가서 보니 아무 흔적이 없었다.

그냥 보냈다.

다음날 보니 뒷문이 안열렸다.

좀 후회를 했지만 또 몇일 지나니 뒷문도 잘 열렸다.


나는 믿는다.

범퍼의 힘을!


범퍼를 삥뜯기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제발 범퍼 떼고 다녀라.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는 바보다.

그러나 늙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있는 자는 더 바보다."


잘 알려진 칼 포퍼의 말이다.


나는 이 말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주 일리있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늙어서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사람이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를 한심하게 보는 것이

가장 어처구니 없는 바보다."


(2016.12.18)


[홍기선 형을 떠나보내며...]


형. 어제 밤 빈소에 다녀왔어요.

형의 어린 남매가 자리를 지키더군요.

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네요.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돕니다.

형의 그 막걸리 냄새 풀풀 풍기는 텁텁한 말투

사진만 바라봐도 형의 그 특유의 단문장들이 들려옵니다.


형에게 노골적으로 말은 못했지만

솔직히 형의 영화는 재미 없었어요.

근데요. 저는 형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했는지 알아요.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그 물러설 수 없는 의지.

그것이 형의 영화에 담긴 마력이었지요.


형과 함께 했던 공간들은 늘 쾌쾌했지요.

본부의 작은 써클룸에서 남영동 2층의 사무실...

그리고 저에게는 가장 최근인 정동의 작은 술집.

거기서 형이 내준 꼬막은 참 맛있었어요.


왜 이렇게 일찍 떠나세요?

딱 한번만이라도 형을 더 보고 싶어요.

별 것도 아닌 형의 그 "융통성 있는 고집"을 듣고 싶어요.

슬픔... 정말 자를 수가 없네요.


형의 유작은 꼭 개봉관에서 볼게요.

이젠 편안히 떠나세요.

그곳에서 그토록 원하던 영화 마음껏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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