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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18. 2020

시위, 그 바리케이트의 역사
그리고 또라이

2016. 11. 16

지금으로부터 35년전. 어떤 또라이 하나가 도서관의 창살을 뜯고 4층 창문밖 난간으로 위험천만하게 나와 유인물을 뿌린다. 기껏해야 백여 명의 학생들이 도서관 주변에 모여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고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모여드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캠퍼스에 상주해 있던 사복경찰들뿐이다. 채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4층 난간에서 구호를 외치던 학생은 경찰에 끌려가고 모여들었던 학생들은 경찰의 이단옆차기를 피해 줄행랑을 친다. 때론 강의실까지 악랄하게 쫓아온 경찰에 질질 끌려가기도 한다. 이것이 당시 시위의 모든 것이었다. 잡혀간 또라이는 깜빵에서 1~2년 지내거나 혹은 군대에 끌려갔고 때로는 의문의 죽음을 당해 싸늘한 시체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시위. 그게 뭐라고. 목숨까지 걸어야했단 말인가. 그냥 또라이지.


이처럼 지난한 학내 시위가 끈질기게 이어진 끝에 1984년쯤. 전두환 정권은 캠퍼스 장악을 포기하고 캠퍼스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켰다. 학생들은 이제 캠퍼스 내에서 자유롭게 모일 수 있었다. 그 확보된 공간에서 학생들은 더 많이 평화롭게 모일 수가 있었다. 토론도 이루어지고 다채로운 문화공연도 펼쳐졌다. 그러나 그렇게 확장된 힘으로 캠퍼스 울타리 내에서 아무리 외쳐봐야 뭐란 말인가?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교문 입구에는 최루탄으로 무장된 경찰이 늘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공방이 이루어졌다. 교문 밖으로 나가려는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댔다. 바닥을 기면서 100미터 이상 굴러와서 터지는 악명 높은 지랄탄을 피해 학생들은 부리나케 도망가기 일수였다. 교문은 양쪽 모두에게 바리케이트였다. 넘어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은밀히 택을 전달하여 삼삼오오 교문을 빠져나와 시민들이나 노동자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일제히 도로를 점거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것도 채 1분을 넘기기 어려웠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찰을 피해서 한 없이 도망을 다녀야 했다. 도망 못가면 잡히는 것이고 잡히면 끌려가서 얻어터지는 것이고, 게중에는 감옥에 가거나 군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게 뭐라고. 몇 명의 시민이나 본다고. 혹여 시민이나 노동자가 본다고 해서 박수라도 쳤나? 미친놈들 허구헌날 데모나 한다고 욕만 먹었지. 그러려고 그렇게 아득바득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나? 그렇게 시위를 했다. 참 또라이짓이지.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가는 길목. 그 1~2년 전부터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조직들은 규모도 커졌고 조직력도 제법 탄탄해졌다. 이때가 되서야 비로소 거리에서의 시위에 일종의 바리케이트가 형성되었다. 그 바리케이트란 쇠파이프와 화염병이었다. 사람들은 그 당시에 왜 ‘폭력’ 시위를 했는지 모르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쇠파이프와 화염병 그리고 보도블록을 깬 돌들은 공격무기가 아니라 방어무기였다. 무엇을 방어하냐고? 시위를 할 수 있는 공간, 시위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시위 자체가 무조건 불법이었다. 경찰의 임무는 그 어떤 시위라도 바로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경찰은 무조건 시위대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고, 시위대는 최소한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형성해야 했다. 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의 또라이들이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모이면 그 앞에 겨우 1백명 가량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드는 경찰에 맞서서 싸웠다. 일반 시위대는 그 뒤 수십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구호와 노래를 불렀고 일부는 화염병을 공급하거나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에게 던지기도 했다. 겁이 나서 바리케이트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돌을 던지면 종종 쇠파이프를 들고 싸우는 우리 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시위대는 바리케이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음에도 무차별적으로 쏴대는 최루탄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경찰에 맞붙어서 싸우는 1백명 가량의 쇠파이프 부대는 눈앞에서 터진 최루탄 가루를 온몸에 하얗게 뒤집어쓰면서도 까딱하지 않고 버텨냈다. 대단한 또라이들이었다. 이러한 끊임없는 거리시위의 역량 축적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6월항쟁도 없었다. 평화로운 시위, 압도적인 시위를 위해서는 그 이전에 치러야할 대가가 있는 것이다.


6월항쟁의 결과 우리 헌법에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문구 하나를 끼워넣게 되었다. 헌법 제21조 2항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이 유별난 문구는 어떤 형태로든 ‘허가’의 형태를 가지면 안된다는 단호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구는 우리가 알 듯이 유명무실해졌다. 그후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서야 간혹 법원이 이 문구의 의미를 되새겨줄 뿐이다. 집회, 시위를 신고하면 늘 ‘허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은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시위문화는 완전히 바뀌었다. 바리케이트 대신 폴리스라인이 만들어졌다. 일단 ‘허가된’ 시위가 열리면 그 공간과 시간은 보호받을 수가 있었다. 경찰은 더 이상 시위대를 무작정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보이지 않는 괴물과 싸워야 했다. 시위의 목적은 위력의 과시이다. 따라서 시위는 그에 따른 정당한 사회적 위력이 확인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시위는 보수언론의 철저한 왜곡과 무시, 그리고 때로는 경찰에 의한 물리적인 차단(시위대와 시민 사이에 차벽을 설치하는 등)으로 본래의 목적을 이루기 어려웠다.


2008년 광화문에서 열린 첫 대규모 광우병 시위. 그때 경찰이 '합법적으로 보장'한 공간은 광화문 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뿐이었다. 인도 앞에는 모두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다. 아마 '합법'과 '평화'를 시위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때 인도를 벗어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도 아무리 사람이 많아서 미어터지더라도 경찰이 허락한 광화문과 청계광장의 인도에서 비비대며 시위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인도에 빼곡히 움집했던 시위대에서 몇 명의 또라이들이 먼저 경찰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폴리스라인을 넘어 도로로 진출했다. 그들은 경찰에 끌려가는 듯 했지만 그 뒤를 이어 시위대가 순식간에 경찰의 폴리스라인을 사정없이 뭉게고 도로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그 여세로 계속 세종대로 선상의 경찰 방어벽을 허물고 청와대 입구의 효자로 대치 상황까지 만들어냈다.(당시 효자로에 급히 세워진 차벽은 지금 돌이켜보면 참 귀여운 차벽이었다.)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차벽과 대치하는 도심 대규모 시위의 시발점이었다.


그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대항하는 시위가 격렬해짐에 따라서 대규모 시위에는 여지없이 차벽과 물대포가 등장하였다. 게다가 헌법에도 어긋나고 법적으로도 근거가 없는 경찰 맘대로의 시위 영역 설정으로 시위는 늘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바리케이트의 성격이 바뀌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공격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기 위한 바이케이트를 만들었다. 그 바리케이트를 공격하고 넘어서려는 것은 시위대였다. 이렇게 진지전을 펼치는 경찰은 훨씬 수월하게 시위대에 대응할 수 있었다. 경찰을 대신하여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여타 사회적 지배기구였다.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발생한 가장 격렬한 파열이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였다. 경찰은 시내 곳곳에서 집회를 마친 시위대가 행진하여 광화문 한 곳에 모이는 것을 부당하게 차벽으로 막았다. 이것은 분명 반헌법적이고 탈법적인 경찰의 폭거였다. 이에 대항하여 시위대는 사전에 준비된 차벽 제거 작전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전에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힘으로 차벽에 맞섰지만 이때는 사전에 밧줄 등을 철저히 준비하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수백명 수천명이 달려들어 영차 영차 밧줄을 잡아당겼지만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2008년부터 8년이 지나는 동안 시위대는 겨우 밧줄 하나를 준비했지만 경찰은 차벽의 방어를 위해 수십 가지 방법을 고안했고, 강력하고 효과적인 물대포, 아니 최루액대포는 계속 업그레이드되었다. 참 순진하기도 하지. 겨우 밧줄 하나라니. 몇 시간 동안 끙끙거리며 밧줄을 당겼지만 30센티 정도 움직였을 뿐이다. 밧줄을 당길 때 리듬을 못맞추면 손바닥이 그슬리기 일수였다. 밧줄꾼들을 향해 최루대포는 사정없이 쏟아졌다. 그때 그 상황을 너무도 아파하고 분노한 어떤 농민이 아무도 없는 차벽 앞에 홀로 서서 한마디 외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최루액대포를 맞고 쓰러졌고 근 1년 후에 사망했다. 참 또라이들이었지. 그게 뭐라고. 겨우 차벽 30센티를 끌어내려고.


그리고 올해 11월 12일 작년과 마찬가지로 민중총궐기가 열렸다. 1년전과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달라졌다. 경찰은 알아서 광화문을 시위대에 내어주었다. 법원은 청와대앞이라는 상징성을 더해줄 수 있는 내자동 사거리까지 진출을 ‘허락’하였다. 아마도 범국민적 분노와 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 때문만이었을까? 부당한 차벽의 설치, 반헌법적인 시위 공간의 제한 등에 맞서서 줄기차게 펼쳐진 또라이들의 노력이 없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4.19때 경무대로 돌진하다가 총탄에 맞고 숨진 사람들은 얼마나 또라이였을까? 공수부대에 맞서서 카빈총 하나 들고 죽음을 맞이하던 광주도청의 그 사람들은 또 얼마나 또라이였을까? 그들은 남들보다 분노를 더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더 강렬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소영웅주의자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고양된 감정으로 상황을 그르칠 수도 있는 말 그대로 또라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던 그들은 또라이, 즉 ‘돌아이’다. 돌처럼 단단한 사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덕분에 그동안 시위 공간을 확보하고, 시위의 권리를 넓혀 나갔다. 그렇게 확보된 넓은 공간에서 우리는 평화로운 시위를 벌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이제 어쩌면 박근혜를 몰아내기 위해 그들에게 또 빚을 져야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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