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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Dec 04. 2020

<작은 빛>(2018)

조민재


<작은 빛>, 붙잡으려는 그러나 흔들리는 정체성


내일 당장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는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두 눈에 담으려고 할까? 그동안 못 본 멋진 영화 한 편을 찾아볼지, 뒷산을 올라가 푸르른 신록을 눈에 담을지, 멀리 바닷가로 달려가 광활한 자연의 힘을 만끽할지, 아니면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두 눈망울에 새기려 할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력이 아니라 기억이라면 어떻게 될까? 시력을 잃는다고 자기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자기 몸뚱이 이외에 한평생 축적해 놓은 자아가 상실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열심히 무엇인가를 기록해 놓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영화의 주인공 진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작은 빛은 가족이었다. 곧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진무는 수술 후에 모든 기억이 상실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고 캠코더에 ‘자기’를 담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자기’는 무엇보다 가족이었다. 그래서 그는 추운 겨울날 홀로 사는 어머니 집을 갑자기 찾아간다. 밤이 되자 진무는 주춤거리며 카메라를 꺼내 잠자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캠코더에 담는다. 그렇게 아무런 예고도 설명도 없이 진무는 은근슬쩍 가족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가족이 평범치가 않다. 선반 노동일을 하면서 홀로 사는 진무 자신을 비롯해서,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어머니, 남편과 이혼 후에 혼자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누나, 그리고 카센터에서 일하는 형. 그렇게 모두가 하나같이 독신이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무와 그의 누나 현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르다. 또한 진무와 그의 형 정도는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르다. 모두가 반쯤 피붙이다. 이들은 그동안 살갑게 지내 온 사이도 아니다. 대부분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는 사이다. 그럼에도 진무는 이들을 찾아가서 어설픈 질문 몇 가지를 던지면서 소위 인터뷰를 한다. 형과는 그런 것조차 어색했는가 보다. 억지로 여러 번 졸라서 예전에 브레이크 댄스를 즐기던 형의 춤추는 모습을 화면에 담아낸다.


자기 정체성을 담기 위한 진무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거대한 산 하나가 앞에 우뚝 서 있다. 험하고 거친 산이다. 바로 20년 전에 죽은 아버지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에 영상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모두 회상하는 말로 전달된다. 아버지의 첫 부인 그러니까 진무의 형인 정도의 친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못 이겨 도망을 가버렸다. 홀로 딸을 낳아 기르던 신숙녀는 수녀의 소개로 대뜸 그 아버지와 합쳐 아들 하나를 더 낳는데 그가 주인공 진무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손버릇이 어딜 가겠는가? 어머니 신숙녀 또한 극심한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남편을 죽일 생각으로 칼을 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진무와 누나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온 아버지는 진무에게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 아버지는 죽는다. 영화에서는 설명이 없지만 아마도 자살로 추정된다. 나이 36살이 채 안 되었을 때이다. 결국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모든 가족이 제 나름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것이다. 아버지의 산소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큰 나무뿌리가 묘 속으로 파고들었다.


캠코더 인터뷰 때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만난 것인 인생의 최대 실수라고 진무 앞에서 말한다. 그럼 진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인가? 여기서 진무는 딜레마에 빠진다. 아버지는 진무의 자기 정체성에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진무는 아버지를 만나러 산을 오른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묘소 앞에서 공손히 절을 하고 가지런히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아버지의 존재는 진무의 정체성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가? 영화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또 하나의 카메라를 등장시킨다. 창고 같은 곳에서 진무가 찾아낸 아버지가 사용했던 카메라에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드문드문 찍은 필름이 남아 있었다. 그 필름에서 나온 사진들은 그들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었음을 애틋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우왁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안경을 쓴 샌님의 모습이었다.


머리를 박박 깎고 수술을 기다리는 진무의 잠자는 모습을 어머니가 캠코더로 찍는 장면에서 시간이 훌쩍 건너뛰어 영화의 엔딩 장면으로 전환된다. 계절이 지나 여름이 되었다. 진무는 다행히도 기억을 상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족 모두는 아버지의 묘소를 파내어 이장을 추진한다. 묘를 파헤치니 아버지의 시신은 20년 넘게 땅속에 있으면서도 아직 해체되지 않고 미라의 형태로 남아 있다. 게다가 시신을 굵은 나무뿌리가 짓누르며 감싸고 있다. 일꾼도 가족 누구도 손사래를 치는 상황에서 진무는 낫을 들고 아버지의 시신을 분리하여 수습한다. 아버지의 모습은 해체되어 상자에 담긴 채 가족들과 함께 산을 내려온다. 이렇게 아버지는 가족들과 화해했지만 결코 온전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조각조각 해체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범상치 않은 영화의 스토리는 감독 조민재의 자전적 이야기다. 작은 공장에서 선반 일을 하며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한 조민재 감독은 자신의 퇴직금을 털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 나중에는 돈이 모자라 엔딩 장면을 찍지 못하고 있다가 2년 만에 완성을 했다. 첫 데뷔작으로서 보여준 그의 절실함과 영화적 성취는 영화의 스토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간혹 시간과 공간이 혼란스럽게 교차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감독의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약간 애매하다. 주인공 진무가 거처하는 곳은 옥탑방으로 보이는데 이 공간에 대한 처리가 혼동을 준다. 자기 방에서 잠이 든 진무가 다음 장면에서 어머니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다음 장면에서는 다시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에 동영상 파일을 저장할 폴더를 만든다. 하지만 이런 시공간적 혼동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영화 <작은 빛>에는 유별나게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잠자는 장면이다. 잠에 들려하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잠에서 깨는 장면이 대략 열 개의 장면 정도 등장하는 것 같다. 아무리 떠올려 보더라도 이렇게 잠을 자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또 하나는 밥을 먹는 장면이다. 가족들은 부지런히 밥을 먹는다. 밥 먹는 장면도 족히 열 군데 정도는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노동을 한다. 어머니의 식당 설거지 장면이 두 번, 형이 카센터에서 세차하는 장면이 두 번, 누나가 출근하거나 준비하는 모습이 두 번 그리고 진무가 퇴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이 일하던 작은 밀링 공업사에서 선반을 다루는 모습이 한 번 나온다. 밥을 차리거나 먹고 나서 설거지하는 장면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사실 진무가 캠코더에 처음으로 잡은 장면은 선반을 다루는 자신의 손 모습이었다. 진무가 기억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가장 먼저 새겨 넣은 것이 노동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조민재 감독의 영화를 통해 축조한 삶의 온전한 모습이다. 먹고, 잠자고, 노동하는 삶. 특히 노동하는 삶에 대한 감독의 시각은 견고하다. 진무가 형을 만나 곱창집에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뉴스가 TV 사운드로 흘러나온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한량처럼 어슬렁거리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에서는 대부분 무시되는 장면들이다. 이처럼 생존의 밑바닥을 훑어내면서도 스토리의 전개를 놓치지 않고 끈끈하게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영화 <작은 빛>의 최대 미덕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밥을 먹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식탁에 앉아서 먹는 장면은 누나 집에서 딱 한 번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방바닥에 앉아서 먹는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의 위치는 낮아진다. 게다가 잠자는 장면까지 자주 등장하니 카메라의 위치와 시선은 더욱 낮아진다.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창안한 ‘다다미 쇼트’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온돌방 쇼트’ 내지는 ‘비닐장판 쇼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이처럼 낮은 카메라의 위치는 비록 이들의 삶이 단순하고 소박하고 때론 넉넉지 못해 서글퍼 보이지만, 결코 불안하고 초조하고 쫓기는 삶이 아니라 왠지 안정되어 보인다. 가족 구성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비천하게 느끼지 않는다. 단단하게 서 있는 자신들만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것이 또한 이 영화가 넌지시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캠코더 인터뷰를 통해 들려주는 아름다웠던 기억이나 가지고 있던 꿈, 그리고 현재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말하라고 하면 쭈뼛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어디 그렇게 단순하기만 할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이 고조되는 장면은 아픈 것처럼 누워 있는 어머니를 걱정해서 진무가 병원에 가자며 어머니를 일으켜 세우자 어머니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면서 “니가 나를 알어?”라는 절규와 함께 아들을 방 밖으로 몰아내는 장면이다. 가족 누구보다도 많은 한을 품고 살아왔을 어머니의 이 돌발적인 행동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삶에 날카롭게 침투해 있을 고통을 외화 시킨다. 농축된 감정이나 고통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아연실색하게 터져 나오는 장면을 즐겨 사용하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는 그다음 장면에서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밤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파국이 아니라 정화된다. 어머니는 장욱조의 노래 <고목나무>를 목놓아 부른다. “옛사랑 간 곳 없다/ 올리도 없지마는/ 만날 날 기다리며/ 오늘이 또 간다,/ 가고 또 가면/ 기다린 그날이/ 오늘일 것 같구나.” 이 두 장면은 한평생 어머니가 걸어온 삶의 감춰진 이면을 또렷이 새긴다. 이처럼 감정이 큰 폭으로 진동한 후에 진무는 어머니 머리를 염색해주며 노인정에라도 가서 남자를 만나보라고 말한다. 이어서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어머니 인터뷰, 어머니가 캠코더를 잡고 아버지 양복을 입은 진무를 향한 인터뷰,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애틋한 부분인 버스터미널의 배웅 장면이 이어진다. 진무는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자 진무의 캠코더는 어머니의 모습을 끝까지 붙잡기 위해 휘청거리며 안타깝게 따라간다.


여기서 우리는 미디어가 매개하는 기억과 존재의 변증법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말로 전해지는 가족사의 이야기는 자칫 따분하게 들릴 수 있다. 여기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것은 순전히 캠코더의 역할이다. 해상도가 좋지 않은 캠코더 화면을 통해 굴절된 모습으로 전해지기에 생동감을 얻게 된다. 여기서 미디어는 기억의 방식이며 굴절의 형식을 가진다. 기억 속에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은 가족 누구에게나 떠올리기 싫은 치부였다. 하지만 아버지 사진기에 20년 동안 남아 있던 필름이라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또 다른 면모를 회상할 것을 요구한다. 가족 누구도 사진에 담긴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 모든 것들은 기억에서 삭제되고 아버지는 폭력으로만 각인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찍은 사진들이 가족의 연대감을 회복시켜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이때 미디어는 잊혔던 진실의 일부를 회복시킨 것인가? 아니면 미디어의 굴절을 통해 거짓을 진실처럼 꾸며낸 것인가? 진무가 기억의 상실을 대비하여 캠코더에 담은 ‘자기’의 모습들은 얼마나 진무의 정체성을 근삿값으로 담아내고 있을까? 만약 진무가 실제로 기억을 잃었다면 찍어 놓은 영상들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해낼 수 있을까? 기억은 존재를 구축하는 질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 기억은 모두 불완전하다. 기억을 조정하는 일종의 ‘메타기억’이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필요한 부분은 요령 있게 굴절시킨다. 그러니 기억이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기억을 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무의 캠코더 역시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 방법 이외에 또 어떤 다른 기묘한 수단이 있겠는가? 그러니 미디어가 불완전한 우리의 기억을 연장시키고 보완한다는 가정하에 불완전한 존재 즉 자기 정체성을 붙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캠코더에 담긴 영상 자체는 진무가 간직하고 싶은 정체성 또는 잃어버린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한 질료로서의 역할을 직접적으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진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캠코더라는 매체를 통해서 소원했던 가족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 자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매체에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매체에 담아내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입과 실천을 통해서 형성되고 변화한다. 갈기갈기 찢긴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진무가 앞장서서 가족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는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진무의 아이덴티니는 고정화되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끊임없이 흔들리던 캠코더의 화면처럼 그들의 삶과 그들의 정체성은 앞으로도 계속 요동치며 앞으로 나갈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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