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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Nov 01. 2020

죽주산성을 걸으며 경계를 생각한다

경기옛길

경계를 걷는다는 것은 늘 위태로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계엔 필시 대립이 있고, 다툼이 있고, 때론 피흘림이 있기에 그러하다. 옛날의 산성처럼 그 경계를 물리적으로 뚜렷하게 남겨놓은 것도 드물 것이다. 산성이라고 하면 으레 공격과 수비, 침략과 방어, 그러니까 아픈 전쟁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 그곳을 찾아 이끼 낀 육중한 돌들을 매만지면 그저 고즈넉한 기운이 마음에 스민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위치한 죽주산성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 바퀴를 휘 둘러야 1.7 킬로미터가 조금 못 미치는 크지 않은 산성이다. 성의 크기가 작기에 더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일까? 산성 위를 걸으며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매산리 벌판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조선시대에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문화유산과 연결하여 도보길로 다듬은 경기옛길 가운데 경상도 쪽으로 뻗어 내린 영남길을 따라 내려오면 경기도의 끝자락 안성의 동쪽에서 죽주산성을 만나게 된다. 반대로 남쪽에서 찾아가면 죽산리 당간지주, 매산리 석불입상을 지나 나지막한 산길을 오르게 되는데 죽주산성 가까이에 다다르면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숨을 고르려 할 즈음이면 벌써 산성에 도착한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산성에 이르면 먼저 산성 위로 발길이 옮겨진다. 안전한 산성 안쪽이 아니라 위태로운 경계 위로 대뜸 올라서는 것은 사람의 무슨 심성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안팎을 두루 살펴보려는 안온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경계에 깊이 스며있는 대립과 항쟁의 소리를 서둘러 듣기 위함일까? 죽주산성에도 그 소리는 여지없이 배어있다.


죽주산성을 향해 남쪽으로부터 경기옛길을 따라 죽산리 당간지주를 살펴보고 돌아 나오면 언뜻 눈에 들어오는 동상 하나가 있다. 그것은 송문주 장군상인데 비교적 최근이랄 수 있는 2017년에 세워진 것이다. 오늘날 죽주산성이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고려시대 고종 23년인 1236년 몽골군의 제3차 침입 때 방호별감 송문주가 성 안에 피난해 있던 백성들과 합세하여 항복을 요구하며 공격해 들어오는 몽골군을 끝내 물리쳤기 때문이다.


송문주 장군의 생몰 연대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그런대로 상세하다. 몽골군이 포를 쏘아 성문이 부서지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맹렬히 저항하여 몽골군의 진입을 물리쳤다. 몽골군이 다시 화공을 펼치며 공격해오자 성문을 열고 일시에 기습하여 많은 몽골군을 죽였다고 한다. 결국 몽골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15일 만에 퇴각하였다. 훗날 조선 후기 정조시대의 정승 채제공이 쓴 송문주 장군의 묘비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몽골군이 죽주산성에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자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다고 한다. 송문주 장군의 용맹스러움과 더불어 지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죽주산성은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천혜의 요새이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까지 올랐던 이덕형이 죽주산성을 “단 한 명의 군사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 국왕에게 보고했을 정도이다. 일찍이 삼국시대 때부터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익히 파악되었고 후삼국시대의 견훤은 9년 동안 이곳을 본거지로 삼기도 했다. 그후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성은 더욱 보강되어 외성, 중성, 내성의 3중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3중 구조가 컴퍼스로 작은 원과 큰 원을 그렸을 때처럼 반듯하게 정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경사가 급한 위치에 성벽을 쌓았기에 그 전체 구조는 자못 복잡하다.


흔히 우리가 아는 성이라면 외국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성을 연상하기가 쉽다. 왕이나 제후가 머무르며 통치하는 지역의 중심 거점이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략적 승패를 좌우하는 피비린내 나는 공성전이 벌어지는 바로 그런 곳 말이다. 하지만 산성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곳은 쉽게 표현하자면 피난처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평상시에는 군대 창고가 있어 곡식과 무기를 준비해 두고, 적이 침략해 오면 평지의 주민들을 들어오게 하여 함께 농성하는 곳이다. 물론 산성 중에도 일정한 지역을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대규모 구조물도 있지만 보통은 전쟁에서 전략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잠시 전란을 피하거나 소규모 전투에서 이기기 위한 곳이다.


여기에 우리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현재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1,200여개 이상의 산성이나 산성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가히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하다. 산성을 쌓으려면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가파른 지형지물을 이용해야 하고, 안에 물길이나 샘이 있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많은 산성을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쉬 알만 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남쪽과 북쪽에서 끊임없이 몰아닥친 침략의 역사를 금방 떠올리게 된다. 1,200개에 이른다는 산성터는 고단했던 민중들의 삶, 피눈물 나는 민초들의 일상 그 자체를 말해주는 산 증거이다.


그러니 산성을 오른다는 것은, 산성을 따라서 하이킹을 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아픔을 딛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 기억할만한 승리의 역사가 깃들어 있든 아니면 처참한 패배의 기억이 남아 있든 모두가 경계의 날카로움에 벤 상처가 있을 뿐이다. 이 육중한 돌무더기들을 누가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날라서 힘들게 쌓아올렸는지는 여기서 굳이 말로 끄집어내고 싶지 않다. 터벅터벅 산성을 따라 걷자니 이처럼 경계를 지어야만했던, 경계를 만들어야했던, 경계가 있어야만 했던 역사가 깊게 생각을 사로잡는다. 그러한 경계의 삶은 불행히도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삶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무엇이든 이물질이 접촉하는 곳에는 경계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서로 다른 민족이 만나거나, 다른 문화가 부딪히는 곳에는 어디서든 경계가 선명해진다. 어쩌면 이렇게 산성으로 물리적 경계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 더 현명한 것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국경이라는 절대 경계를 지니고 살지만 그것이 옛날의 산성처럼 호들갑스럽지는 않다. 대부분의 국경은 그저 상징적 혹은 추상적인 경계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휴전선은 예외로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경계가 희미해졌다고 해서 경계의 날카로움에 베일 가능성이 적어진 것은 아니다.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는 생각의 차이, 욕망의 차이, 하다못해 취향의 차이로도 쉬 부정형의 경계가 조성되고 그 경계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인간은 아직 경계를 극복하거나 허무는 현명한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이런 두서없는 생각을 머리에 섞으며 산성 위를 걷는다. 때론 돌길을 걷기도 하고, 때론 잔디나 풀, 또는 흙을 밟아 나간다. 산성의 가장 높은 지형에 위치한 소나무 한그루가 벼락에 맞아 반 토막이 되어 쓰러져 있다. 여기가 이 일대의 가장 높은 지대임을 희생된 소나무가 말해준다. 흘끔흘끔 산성 바깥 낭떠러지를 위태로이 살피는 것 또한 누구나 하게 되는 궁금증의 발로이다. 몽골군이 여길 기어오르려 했을까? 그것을 어떻게 막아 냈을까? 이런 단순한 생각이 나만의 몫은 아니리라. 산성을 반 바퀴쯤 돌아드니 처음 산성 입구에서 반대편 쪽으로 걸어갔던 사람들과 마주친다. 이유 없이 반갑다. 이 또한 사람의 심성인가보다. 경계가 날카로운 대립의 상징이 아니라 이처럼 서로를 푸근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싶다. 역사는 대립을 통해서 다음 단계로 조금씩 발전된다고도 하지만 그 대립이 꼭 상대방과 상처를 주고받는 무한 대결의 모양새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산성 위를 이쯤 돌고나니 비로소 산성 안쪽에 관심이 가고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터벅터벅 안쪽으로 걸어내려오니 송문주 장군의 사당을 먼저 지나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송문주 장군 사후인 1200년대 후반에 이 사당이 처음 만들어졌고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되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기 전까지 제향날이면 죽산의 군인들이 취타대를 앞세워 성대히 제향행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앞마당과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좀 애석한 마음이 들지만 지난여름 오랜 장마가 훑고 간 이후에 아직 정비를 하지 못한 것이려니 생각한다.

작게 난 길을 따라서 조금 더 내려오면 연못 세 개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물은 모두 빠져 있지만 그중 하나에는 중앙에 작게 터를 잡아 나무 한그루까지 심어 놓았으니 제법 풍취가 감돈다. 아니, 위급을 다투는 이런 곳에서 연못을 만들고 놀았단 말인가, 하는 부족한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인지라 물을 모아 놓는 시설이 이처럼 중앙에 반듯하게 조성되어 있는 것은 죽주산성이 얼마나 방비가 잘된 곳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산 정상 가까운 곳에 물길이 어디 있으며 샘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연못 근처에 돌로 만들어 놓은 작은 수로에는 지금도 졸졸졸 물이 흘러 내려간다. 이쯤 되니 송문주 장군이 연못의 잉어를 잡아 몽골군에게 보내 풍부한 물을 과시했다는 말이 그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죽주산성을 뒤로 하고 매산리로 내려오면 참으로 정감이 가는 석탑과 석불을 만날 수가 있다. 매산리 석불입상과 그 앞에 자리 잡은 미륵당 오층석탑이 그것이다. 국보급 문화재에서 볼 수 있는 조형미와 균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것을 소박미라고 부르는 것일까? 석탑은 이것저것이 유실되어 있고 상처 또한 한두 곳이 아니며 자세히 살펴보면 돌들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쌓아 올려 있다. 석탑의 몸돌(옥신석)들이 대부분 유실되어 있으니 전체 높이가 아담하여 사람 키와 비슷하다. 처음 마주치면 풋, 하고 웃음이 감돈다.

그 뒤편에 5.6미터 높이로 제법 커다랗게 서 있는 석불입상, 즉 미륵불상 또한 다르지 않다. 큰 돌로 받침이 세워진 누각 안에 잘 모셔져 있기는 하지만 누각의 높이가 낮아 미륵상 머리 위로 높게 올린 덮개(보개)가 거의 누각 천장에 닿은 듯이 보인다. 미륵불의 이목구비는 비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유난히 굵은 목과 어깨까지 닿은 두 귀 또한 괴이하다. 누군가가 장난을 쳐 놓은 것인지 입술은 빨간 색조가 감돈다. 하지만 미륵상의 두 손에 눈길이 이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의 없애준다는 뜻을 담고 있고, 왼손은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양이 현대 회화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왜곡되어 있고 투박하지만 정성만은 가득해 보인다. 이 불상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이 오롯이 두 손에 모아져 있는 듯하다. 다른 부분의 불균형은 아랑곳없고 오로지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는 뜻을 담은 미륵상의 두 손에는 민초들의 소망이 배어 있다.

다시 저 멀리 산을 바라보게 된다. 죽주산성이 올려다 보인다. 민초들이 소원을 기원하는 이 소박한 조형물은 산성이라는 현실적인 장벽과 뚜렷이 대비되기도 하며 또한 하나가 되기도 한다. 기원과 소망은 삶을 지탱하고 일으켜주는 지렛대이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경계의 장벽은 또한 삶의 버팀목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 오랜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겨진 이곳에는 민중들의 고단했던 삶과 침략에 맞선 용기와 소박했던 믿음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오늘날 이렇게 우리의 발길을 인도한다.


한참 인기를 끌었던 우리나라 드라마 <킹덤>에서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거나, 아니면 그냥 내달려서 한양과 동래를 오가던 그 길이 바로 영남길이라면 크게 어긋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옛날에는 길이 왕래하는 곳이요, 통신하는 곳이요, 물자를 나르는 곳이다. 삶의 근간이 길에 의존하였다. 하지만 그 길은 오늘날의 8차선 고속도로일 필요가 없었고 수레 하나 정도가 넉넉히 지나갈 수 있으면 족했을 것이다. 드라마 <킹덤>에 묘사된 길도 그런 정도의 길이었고, 복원된 영남길도 딱 그 정도의 길이다. 그 기세등등했던 로마의 군단이 이동하던 아피아 가도도 폭이 8미터 정도라니 대략 3~4미터 폭으로 이루어진 영남길이라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거기에 깃든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걷다보면 큰 길과 합쳐지기도 하고, 정감 나는 시골의 오솔길이 되기도 하고, 무르익은 곡식들이 펼쳐 보이는 농로가 되기도 하고, 작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이 되기도 한다. 때론 제법 가파른 산길이 되기도 하고, 때론 이 길이 맞는지 싶어서 서성대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으레 경기옛길을 나타내는 작은 리본이 정겹게 저 앞에서 나풀거리며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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