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번역본을 읽더라도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것이 고급스럽게 장정된 책이든 문고판 책이든 설사 e북이든, 얍삽한 축약본이 아니라면 그는 위고를 제대로 만나는 것이다.
설사 게반트하우스에서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베토벤을 듣지 않더라도, 최고급 오디오장비를 갖추지 않았더라도, CD나 MP3로 베토벤을 듣는다고 누가 어설픈 음악애호가라 흉볼 사람은 없다.
개봉관에서 보지 못한 큐브릭의 영화를 다운로드해서 본다면 영화애호가로 칭찬을 받을 망정 엉터리라고 손가락질 받을 리 없다.
그런데 다비드의 그림을 화보집에서 본다고 미술을 감상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정보를 접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직접 루브르에 가서 그 앞에 서기 전에는 다비드를 감상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나마 미술관에 상설 전시 또는 가끔씩이라도 순환 전시되는 작품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아마도 생산된 미술 작품의 99%는 아무도 감상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사를 위해 세검정에 보관되어 있던 아버지 작품 60여점을 포장했다. 언제 다시 포장을 풀 지 기약이 없다.
미술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