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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3. 2020

잡문7

[무릇 예술가는...]


1. 자기 자신과 대화해야 한다.

2. 자기가 놓인 사회 또는 역사와 대화해야 한다.

3.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표현방법과 형식을 붙잡고 끊임없이 씨름해야 한다.

4. (3번을 위해) 자기보다 앞선 예술가와 대화해야 한다.

5. (3번을 위해) 함께 동시대를 사는 다른 예술가와 대화해야 한다.

6. 그리고 작품을 감상할 사람들, 그리고 평론가들과 대화해야 한다.


1~3은 혼자 힘으로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4~6은 예술을 둘러싼 환경이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4~6이 빈곤한 곳에서 훌륭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은 칠레에서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가 나오고, 멕시코에서 바둑의 고수가 나오고, 캄보디아에서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프로그래머가 나오는 것과 같다.


[어머니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년 넘게 어머니가 사시던 집을 이번에 정리하였다. 주로 어머니가 혼자 사셨지만 그 공간에는 3남매의 숨결이 공존해 있었다. 내 물건도 거기 쌓여 있었고, 누나 결혼 앨범도 엉뚱하게 거기 있었고, 동생의 학창시절 앨범도 여태껏 거기 있었다.

어머니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런 물건들이 모두 3남매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매니악]


사람마다 유별나게 애착 또는 집착을 가지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모아두기를 즐겨하는데 그게 좀 병적으로 심하면 매니악이 된다.


나에게도 3가지 매니악이 있는데 한 가지는 공개하기 곤란하고 나머지 두 가지는 이번에 어머니집 이사짐을 싸면서 확실히 내가 매니악 수준인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베개매니악이다. 지금도 나의 잠자리 주변에 3개의 베개와 3개의 쿠션이 있다. 가장 편안한 자세를 구현하기 위해 이용된다. 근데 이번에 어머니집을 정리하면서 거기서 내가 사용하던 2개의 베개와 하나의 쿠션을 더 긁어 모았다. ...어쩌자는 것인지.


다른 하나는 멀티탭매니악이다. 지금도 멀티탭이 남아도는데 어머니집 여기저기 있던 멀티탭 또는 익스텐션 코드를 10개 정도 더 챙겼다. 먼지구덩이에 처박혀 있던 것까지 악착같이 챙겼다. ...어쩌자는 것인지.


하지만 이번에 과감히 버린 것이 있다. 근 30년 동안 컴퓨터 및 주변기기 등과 관련된 온갖 코드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싸들고 이사를 다녔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코드가 필요하면 나의 코드 보물상자에서 무엇이든 찾아낼 수 있었다. 말이 보물상자지  거의 캐비넷 하나를 빼곡히 채울 양이었다. 이번에 대폭 1/5 정도로 줄였다. 아직도 많기는 하지만 코드매니악은 벗어난 것이다.


[마지막 구찮은 일]


어머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거실과 안방의 커튼을 바꾸어 달았다. 의자를 놓고도 키가 커야하기에 커튼을 떼어내고 빨아놓은 새 커튼를 다는 것은 늘 나의 몫이었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커튼 고리를 하나 하나 떼어내거나 끼우는 것은 어지간히 구찮은 일이었다. 커튼 하나에 고리가 스무 개 정도 있으니 안방과 거실 좌우로 네 개의 커튼에 총 80개 정도의 고리를 빼고 걸어야 했다.


...... 그 일이 언제 끝났는지 기억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커튼갈이를 하지 않으셨다. 이 구찮은 일이 어느 순간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늘 마지막으로 커튼을 떼어내면서였다. 커튼은 때가 꼬질꼬질했다.


어머니의 단기기억상실이 심해지셔서 누나집으로 모시고 나도 그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어머니가 30년간 살아온 집을 몇일째 정리하고 있다. 하루 이틀이면 끝낼 줄 알았는데 오늘로서 5일째이고 내일 하루 더 정리를 해야 한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커튼갈이와 같은 구찮은 일을 시키지 않으신다. 아니 시킬 수가 없다. 어머니가 나에게 더 이상 구찮은 일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픔으로 밀려온다.

(2019.3.8)


[개밥이 된 이 잡탕을 어이할꼬]


보통은 충분한 성개방의 쓰나미가 사회를 휩쓴 후 그 한계와 균형과 마지노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성추행의 개념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는데, 성개방은 유교 문화로 꽁꽁 묶여 있어서 거의 수녀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회에서 성추행 특히 언어적 성추행은 어떻게 자리매김할꼬.


개인주의가 고도화되어 있지만 나만의 개인주의일 뿐 상호적인 개인주의에 적응하지 못해서, 남의 사생활에 기를 쓰고 목을 빼어 들여다보려는 심사가 사회 전반에 횡횡하는데다가, 간통죄가 없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사생활 보호는 이루어지지 않아 인터넷을 통한 사회적 간통 처벌이 더 무서워진 진창이 된 세상은 어이할꼬.


무소불위의 굳건한 가부장 문화에, 권위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질곡에, 공사를 구분 못하는 특유의 노동 문화가 잡탕이 된 사회의 각개 현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본능과 욕망과 탐욕과 위력과 횡포들 사이에서 '사랑'은 어떻게 숨이나 쉬면서 생존하고 있을꼬.


5.18 때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고, 의도적인 허위 사실이고, 몰지각한 정치적 선동력이 있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불법'으로 처벌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특정인에 대한 명예훼손죄로 처벌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정치적인 책임은 당연히 져야한다. 그렇기에 3명의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영원히 몰아내야 하고 그를 비호하는 민정당스러운 자한당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쟁투지 법의 문제는 아니다.


나치에 의한 조직적인 유태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법 당당하게 책까지 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5.18 북한군설 만큼이나 도발적이고 터무니없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그 주장을 하는 것 자체로 처벌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지켜지지는 않는다.


터무니없는 주장이 휑휑하고 그런 주장이 어떤 무리들에게는 먹히고 그래서 그 사회가 좀먹는다면 그런 사회는 법을 만들던 말던 망해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지금 필요한 일은 대중의 건강한 상식을 정치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지 되도 안을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세요]


벌써 5년은 된 듯 싶다. 어느 순간부터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넘어서 눈물이 나고 아파왔다. 30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컴퓨터로 일하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종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안하던 짓을 했다.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간 것이다. 용하다는 안과의사였지만 겨우 처방한다는 것이 눈이 침침해지지 않게 물약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 인생 종 쳤구나 하고 있는데 우연히 어디선가 '모니터용 안경'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잽싸게 안경점을 찾아갔다.


그런데 안경점에서 모니터용 안경의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직접 설명하고 평소에 눈과 모니터의 거리에 딱 맞는 안경을 주문했다. 그 안경을 끼니 천하를 얻은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봐도 눈의 피로가 없었다.


최근에 친구가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일을 같이 했다. 눈이 아파서 모니터를 오래 못본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 길로 바로 끌고 나가서 안경점에 갔다. 꽤나 잘 나가는 안경점이었다. 모니터 안경 맞추겠다고 하니까 다초점을 쓰라는 둥 헛소리를 했다. 지금 다초점을 써서 해결 안되서 온 사람에게. 결국 모니터 안경을 맞춰서 쓴 내 친구는 진심으로 말했다. "고맙다. 나에게 제2의 인생을 주어서..."


왜 안과의사는 몰랐을까? 왜 안경점은 아직도 헛소리를 할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인류사의 첫번째 세대이기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컴퓨터로 일하다가 50대 후반의 나이가 되서도 여전히 컴퓨터로 일을 해야 하는 첫번째 세대가 바로 우리였다. 그러니깐 아직 젊은 의사나 안경점은 헛발질하는 것이다.


혹시 모니터를 조금만 봐도 눈이 침침해서 일을 못하는 분이 있다면 내일 당장 '모니터용 안경'을 맞추시라. 제2의 인생이 시작된다.


[생존과 유희 사이]


나의 식문화는 단순하다. 배고픔이 참지 못할 만큼 느껴지면 뭐라도 우겨넣는다. 그냥 생존의 식문화다.


오늘 생애 최고가의 점심식사를 했다. 미슐랭가이드 원스타 프랑스 음식점. 페어 와인(음식에 맞춰서 고급 와인이 3잔 제공된다)이 거의 음식값에 근접한다.


오늘 깨달았다. 음식은 우겨넣는 것이 아니고, 씹어 삼키는 것도 아니란 것을. 그냥 입에 넣기만 하면 자동으로 사르르 녹아 알아서 목구멍을 넘어간다는 것을.


유희의 식문화. 인생에 2~3번은 할 만하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처럼 갑자기 마음이 따듯하고 풍요로와진다.


그날 나는 시를 썼다.

유치하기가 짬뽕스러운 그 시를.

허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피로 물든 마음은 문장을 뒤틀고

단어들을 격리시켰다.

감당키 힘든 격정으로 겨우

얼기설기 생경한 신음을 이어붙였다.

그걸 시라고 사람들 앞에서 읽기까지 했다.

숨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그런데

그건 어디갔나.

가슴을 찢어대던 그 감정은.

죽음은 저기 그대로 있는데.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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