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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3. 2020

성찰에 대하여

인류사에서 나름 '가르침'으로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너무 뻔한 거다. 왜 뻔하냐 하면 다들 너무나 강조하고 반복해서 식상해졌기 때문이다. 이걸 살짝 뒤집어보면 인간이 그 두 가지를 참 오지게도 못한다는 뜻이다. "살인하지 말라." 이게 무지 중요하긴 하지만 이걸 강조하는 가르침은 없다. 왱간하면 대략 지켜나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것은 곧 그걸 제대로 못한다는 뜻이다.


그 두 가지는 성찰과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오해는 일단 차치하고 성찰에 대해서도 기본부터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너 자신을 알라."로 대변되는 성찰은 나의 존재를 파악하라는 추상적이거나 실존적인 것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머리 쥐어박으며 반성하고 "내탓이요"라는 주문을 외라는 것도 아니다.


성찰이 어려운 이유는 내가 내가 아니기도 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고,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복잡한 인간의 관계망 속에 끊임없이 명멸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뜬구름 잡는 말을 그냥 편하게 실생활에서 적용하려면 이런 거다. 나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귀에 들어갔을 때라야 존재한다. 따라서 나의 말이 상대방의 귀에 "어떻게" 들리며,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드리며, "어떻게" 소화하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이고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성찰이란 면벽수행이 아니고, 대가리 박기도 아니고, 말끝마다 내탓이요 하는 것도 아니다. 성찰은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어려운 것이고 그러니 늘 강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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