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프로젝트
고등학교 시절 처음 <데미안>을 읽고 반백년이 지나서 다시 마주했습니다. 당시 내용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뛰는 충격으로 한동안 멍청해져 있었던 그때의 내 모습만 떠오릅니다.
이 책이 왜 그렇게 강렬했던 걸까?…
다시 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다가 <데미안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는 정여울을 만났습니다.
가슴이 울컥해지면서 오랜만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반백년 돌고 돌아 다시 처음 만났던 그때의 자리로 찾아간 느낌입니다.
“난 아직도 ego에서 self로 옮겨가지 못하고 여전히 이렇게 그 경계를 맴돌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싱클레어가 만난 데미안처럼
내게는 예수그리스도가 있는데
마주 볼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서 그런지..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셀프보다는 에고에 휘둘려 지내며 번민합니다.
이런저런 넋두리하기 전, 정여울의 책 <데미안 프로젝트>의 한 챕터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다> 전문을 뽑아 옮겨보렵니다.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되는 분들 중 누구라도 저와 같은 심경에 공감하신다면.. 제 작은 수고의 보람으로 채워질 듯합니다. ^^
우리 안에는 또 하나의 자아가 살고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해 내는 존재야.
제가 평생 애지중지 아껴온 수많은 문학작품들은 싱클레어의 친구 데미안처럼 제 무의식 깊숙한 곳에 스며들어 제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때로는 제 안의 데미안이 손을 내밀어서,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타인의 어깨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걱정 마요, 당신 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지혜로운 또 하나의 멘토가 살고 있어요. 당신이 인정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가장 뛰어난 스승은 당신 안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일지도 몰라요."
이렇게 위로해 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따스한 말을 속삭이는 '또 하나의 나'는 결국 제 안에 살고 있는 데미안일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나와 문학작품 속 주인공 사이의 경계가 아름답게 흐릿해지는 그 순간이 우리가 문학 안에서 '셀프 self(내면의 자기)'를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학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제 안의 '에너지 지수'가 높아지는 느낌입니다. 무적의 필승 비결이라도 얻어낸 것처럼, 영혼만은 재벌인 것처럼, 그렇게 마음속에 든든한 영감의 창고가 그득해집니다. 데미안 같은 멋진 스승을 제 삶 속에서 항상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데미안을 설령 다시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거울을 보고 데미안을 간절히 부르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또 하나의 데미안임을 온몸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에고’에서 ‘셀프’로, 즉 ‘사회적 자아’에서 ‘내면의 자기'로 변신하는 과정입니다. 자기 안의 충만한 셀프를 만나게 되기까지 저는 《데미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데미안이라는 초월적인 존재, 때로는 부담스럽고 대단히 위대하며 좀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멘토 같은 존재를 마침내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결국 싱클레어가 에고의 가면을 벗고 진정한 셀프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속에서 절실하게 말을 거는 또 하나의 나를 따스하게 끌어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존재로 힘차게 비상합니다. 그것이 카를 구스타프 융이 말하는 개성화입니다. 개성화는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에고'와 '진정한 나 자신을 지켜내 는 셀프'가 하나 되는 순간, 사회적 자아가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만나는 순간을 말합니다. 이 개성화의 과정이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우정이 깊어지는 그 모든 순간입니다.
에고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홍보하느라 너무 황폐해져 버린 현대인은 또 하나의 셀프, 자기 안의 데미안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 안에서 치유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오직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첫 문장입니다. 첫 문장을 읽을 때마다 아직도 가슴이 떨리고 두근거리고 이상한 설렘과 알 수 없는 불안 과 환희와 희열 같은 게 느껴집니다. 아마 <데미안>이 저에게는 진정한 블리스 bliss가 아닐까, 즉 내면의 깊은 희열을 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절실한 고민을 안고 작품을 볼 때 훨씬 더 그 작품이 눈에 깊게 들어옵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내 안에는 왜 이렇게 많은 상처가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내 안에는 왜 이렇게 많은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와 온갖 콤플렉스 같은 것들이 살고 있어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이리도 어려울까. 이런 고민을 했을 때 다시 《데미안》을 읽으니 그때 비로소 《데미안》이 더 깊고 풍부한 의미로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직 내 안에 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라는 그 질문은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내 속에서 저절로 솟아 나오려는 것은 에고가 아니라 셀프지요. 진정한 내면의 자기와 만나는 건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하는 의지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개성화로 성큼 다가가는 한걸음이 될 것입니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어떤 이들은 도마뱀이나 개미에 그치기도 한다.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이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내던진 존재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라는 존재로부터 나왔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지만, 저마다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간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어떤 사람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해서 정말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융의 용어로 표현하면 셀프, 진정한 자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개미나 개구리나 도마뱀에 그치고 만다는 것은 셀프에 도달하지 못하고 에고의 어떤 일부를 간직한 채, 에고의 껍데기를 깨지 못한 채로 자신의 상처에 갇혀버린다는 말이 됩니다.
에고에서 셀프로 가는 길은 정말 험난하지만, 그 길이 꼭 슬프고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그 길의 문턱을 조금씩 넘을 때마다 우리는 진정한 친구와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문턱을 넘는 순간은 '마음속 아픈 그림자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대면 confrontation’이라고 하는데, 내 아픈 상처와 만날 때 그것이 아픔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깊이 만날수록 인생의 보다 깊은 차원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또렷이 대면하지 않으면 셀프와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면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모두 이해하고 트라우마와 온갖 아픔과 슬픈 기억까지 속속들이 이해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셀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싱클레어가 크로머를 만나지 못했다면, 데미안과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셀프와 만나는 길은 그만큼 느려지거나 더 어려워졌겠지요.
물론 '내 안의 깊은 상처와의 대면'을 시도하면 화가 나고 슬퍼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장면을 보면 무척 화가 납니다. 어쩌면 제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보는 것처럼 슬프고 마음이 찢어집니다. 어린 시절 저에게도 크로머 같은 무서운 사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트라우마를 그냥 덮어두기만 하면 치유되지 않습니다. 아픈 기억을 일단은 덮고 싶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은 방어기제입 니다. 방어기제를 뚫고 그 상처를 직접 대면하고자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지요. 그런 용기를 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기 안의 데미안과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개성화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