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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작가들(14) - 조남주

밑줄은 어떻게 내 안에서 울리는가

by 세잇

증명되지 않은 존재들의 변호사

조남주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82년생 김지영』의 열풍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열풍이 지나간 뒤, 사람들이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며 피로감을 드러낼 때였다. 나는 유행이 지난 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열기가 식은 자리에서 진짜 남은 것들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때 발견한 조남주 작가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사회 고발의 선봉에 선 투사도, 페미니즘의 대변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법정의 증인석에 앉은 사람 같았다. 차분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본 것만을 증언하는 사람. 그런데 그 증언이 너무도 선명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처럼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조남주를 '증명되지 않은 존재들의 변호사'라고 부르고 싶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 목격자, 참고인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진짜였다는 것을, 자신의 고통이 타당하다는 것을, 자신의 목소리가 들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조남주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문장이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것은 법정 기록의 문체인 것인가. '피고인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증인은 더 이상 진술을 거부했다' 같은. 김지영이라는 개인의 침묵을 기록하는 이 방식에는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톤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객관성 때문에 침묵의 무게가 더욱 묵직하게 전해졌다.



아카이브의 미학

조남주 작가의 정체성은 소설가가 아니라 아키비스트(기록보관인) 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야기를 창작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보존하는 일에 더 공을 들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82년생 김지영』을 쓰기 위해 그가 한 작업을 생각해 보라. 논문과 기사, SNS 게시물들을 뒤지고, 통계자료를 찾아보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의 방송작가 경험이 녹여져 있어서일까. 이것은 소설가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사회학자나 인류학자의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하나의 개인사 안에 촘촘히 배치해서 개인의 경험이 곧 사회의 구조임을 보여준다.


이런 작업 방식은 『사하맨션』에서 더욱 정교해진다. 30년에 걸친 사하맨션의 역사를 12개의 파편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구성은, 마치 박물관의 전시실을 거닐며 유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 같다. 각각의 장(chapter)은 하나의 전시 케이스이고 그 안에는 특정 시대, 특정 인물의 경험이 표본처럼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 없었어. 따라가도 없었어. 그러니까 항상 진짜가 어디 있을지 생각해야 해."


사하맨션의 관리소 영감이 진경에게 하는 이 말은, 사실 조남주 작가 자신의 작업 철학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진짜는 공식 기록에 없다. 신문이나 정부 발표, 공식 역사에는 없다. 그것은 사람들의 경험 속에, 일상의 틈새에,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 있다. 작가는 바로 그 '진짜'를 찾아 기록하는 사람이다.



감정의 고고학자

조남주 작가의 독특함은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감정을 즉석에서 표출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떤 경험들이 층층이 쌓여서 지금의 감정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마치 고고학자가 지층을 파면서 각 시대의 흔적을 찾아내듯이.


『82년생 김지영』의 구성 자체가 그렇다. '1982년~1994년', '1995년~2000년', '2001년~2011년', '2012년~2015년'으로 나뉜 각 장은 김지영의 감정적 지층을 보여준다. 유치원에서 남자아이들에게만 주어진 간식, 초등학교에서 '여자는 수학을 못한다'는 편견, 중고등학교에서의 외모 평가, 대학에서의 성희롱, 직장에서의 차별, 결혼 후의 경력단절. 이 모든 경험들이 퇴적되어 2015년 가을,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김지영을 만든다.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문장에서 주목할 점은 '갑자기'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눈물이 전혀 갑작스럽지 않다는 것을. 30여 년간 쌓여온 수많은 순간들의 결과라는 것을. 조남주는 이렇게 감정의 고고학을 통해 개인의 아픔이 어떻게 사회 구조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귤의 맛』에서도 마찬가지다. 네 소녀의 우정이 어떻게 형성되고 균열되고 다시 회복되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청소년소설의 관습적인 성장 서사를 따르지 않고, 관계의 미시적 변화들을 정밀하게 관찰한다. 특히 '귤의 맛'이라는 메타포가 인상적이다. 귤은 하나하나가 다른 맛을 갖지만, 그 차이를 알려면 직접 까서 먹어봐야 한다.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것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조남주가 인물들의 감정을 탐구하는 방식이다.



부재의 존재론

조남주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들은 역설적이게도 부재하는 존재들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은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간다. 어머니, 할머니, 친구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정작 자신의 말은 사라진다. 『사하맨션』의 수는 죽음으로써만 존재한다. 『서영동 이야기』의 인물들은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부재는 완전한 사라짐이 아니다. 오히려 부재를 통해 더욱 강력하게 존재한다. 김지영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갈수록 그 침묵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수의 죽음은 사하맨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가 된다. 서영동 주민들의 상실감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사하맨션 사람들의 이 물음은 정체성의 부재를 호소하는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기존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실이기도 하지만 자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작가가 가진 독특한 존재론적 감각이라고 본다. 그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누군가의 경험 속에,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 살아있다면 그것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죽은 자와 산 자, 사라진 것과 남아있는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우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하맨션』의 마지막 문장인 이 말은, 변화의 불가역성을 선언하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실이기도 하지만 해방이기도 하다.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의 지질학

조남주 작가의 시간 감각도 특이하다.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고, 개인사와 역사가 교차하며, 때로는 미래가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구성을 보라. 1982년부터 2015년까지의 시간을 몇 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제시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각 시대의 경험들이 현재의 김지영을 구성하는 지층들로 기능한다. 유치원 시절의 차별 경험, 학창 시절의 성별 고정관념, 직장에서의 유리천장, 결혼과 출산 후의 경력단절. 이 모든 것들이 동시적으로 현재의 김지영에게 작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김지영이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할 때, 그 목소리들이 모두 과거에서 온다는 점이다. 돌아가신 할머니, 어머니의 목소리. 과거의 목소리들이 현재의 김지영을 통해 되살아나면서, 시간의 경계가 무너진다. 이는 트라우마의 시간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갑자기 침입하고, 미래에 대한 상상이 과거의 기억에 의해 제약받는다.


『사하맨션』에서는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12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제시한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시간순으로 배열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고 때로는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에서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런 구성은 사하맨션의 시간이 일반적인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운의 발전하는 시간과 달리, 사하맨션은 정체된 시간, 반복되는 시간 속에 있다.



번역자로서의 작가

조남주 작가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번역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새로운 플롯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지만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다.


김지영의 침묵을 언어로 번역하고, 사하맨션 사람들의 절망을 희망의 가능성으로 번역하고, 청소년들의 혼란을 성장의 서사로 번역한다. 이런 번역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본의 뉘앙스를 잃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의 탁월함이 나오지 않을까.


예를 들어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경험들을 서술할 때 작가는 감정적 수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억울했다', '분노했다', '절망했다' 같은 직접적 표현 대신, 상황 자체를 담담히 기술한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그 상황에서 느껴야 할 감정을 스스로 발견하게 만든다.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매일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고 어떤 선택을 하든 무언가는 포기해야 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개인의 한탄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여성들이 겪어온 현실의 압축이며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축약된 증언이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전체의 구조를 드러내는 번역 작업을 해낸다.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지 않을까. 번역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겠지. 침묵의 의미를, 부재의 존재감을, 말할 수 없음의 절실함을 어떻게 언어로 옮길 것인가. 조남주 작가는 바로 이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을 해내는 사람이다.



공명하는 텍스트

조남주 작가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책을 덮은 후에도 그 텍스트가 계속 내 안에서 울린다는 것. 마치 종소리처럼, 한 번 들리기 시작하면 쉽게 멈추지 않는다.


이는 그의 텍스트가 가진 특별한 공명 구조 때문인 것 같다. 조남주의 문장들은 완결되지 않는다. 여백을 남겨두고 독자의 경험과 공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에서 독자의 기억과 작가의 서술이 만나고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이 간단한 문장이 왜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까? 그것은 이 문장 안에 각자의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각자가 정의해야 한다. 작가는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의 틀을 제공한다.


"정신 놓지 마. 이대로 놓아 버리기엔,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깝다."


『사하맨션』의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정신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여기는 어디고 어떻게 도달한 것인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 때문에 독자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이 문장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다.


이런 공명 구조는 작가의 작품이 단순한 사회 고발을 넘어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그의 작품이 단순히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쳤다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사회가 변화하면 그 의미를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현실을 넘어서는 실존적 질문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조남주라는 작가를 통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문학이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활성화시키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문학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문장들이 내게 남긴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울리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이 질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조남주라는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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