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오늘 당신의 생각으로 살았는가
고정관념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지불한 가장 게으른 비용이다.
언젠가 문득 내 인생이 중위권으로 확정되었다는 기분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선배들이 닦아놓은 매뉴얼을 훑으며 남들이 타당하다고 믿는 분석 툴에 내 생각을 끼워 맞추던 날들. 그 안락한 프로세스 속에서 나는 안전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무기력했다.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 생각의 근육은 서서히 퇴화하고 있었달까.
소설의 형식을 빌은 서재근 님의 《생각하는 늑대 타스케》는 바로 그 지점, 우리가 '당연하다'라고 믿으며 사고의 스위치를 꺼버린 찰나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광고계의 전략가인 저자는 타스케라는 늑대 팀장의 입을 빌려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거대한 고정관념의 덩어리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책은 단순한 기획 지침서가 아니다. 그것은 습관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힌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하나의 투쟁 기록에 가깝다.
생각의 삼투압: 전문가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서
우리는 흔히 전문가의 견해 앞에 작아진다. 필립 코틀러 같은 마케팅의 거성이나 수만 개의 데이터가 집약된 숫자를 마주할 때, 우리는 스스로 결론 내리지 않고 그 결과를 좇는다. 하지만 타스케 팀장은 경고한다. 전문가의 말을 듣는 순간 우리의 '생각의 스위치'가 꺼진다고.
"배운다는 것은 얌전히 앉아서 누가 가르쳐주는 것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야.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잘 어우러져 새로운 생각으로 빚어지는, 일종의 ‘생각의 삼투압’ 과정이지."
이 문장은 내게 서늘한 감각을 남겼다. 배움이란 지식의 일방적인 이식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과 나의 세계관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섞이며 '나만의 결론'을 추출해 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기 전에 나만의 가설을 세워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타인의 생각을 복제하는 기계에 불과해진다. 통찰력은 재능이 아니라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에 자신감을 가질 때 비로소 싹트는 법이다.
당연함이라는 이름의 결핍
소설 속에서 타스케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영어에는 왜 존댓말이 없을까?" 사람들은 이 질문에 '원래 그러니까', '문화가 달라서' 같은 당연한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타스케는 '당연하다'는 믿음 자체를 해체하라고 주문한다. 우리가 이유를 모르는 것과 그것이 원래 당연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세상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면적으로만 본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어머니인 청소부 아주머니를 우리는 그저 복도의 배경으로만 인식한다. 컵을 위에서 보면 원이지만 옆에서 보면 사다리꼴이듯, 모든 진실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고정관념이란 우리가 세상을 입체적으로 관찰하기 귀찮아서 선택한 '단면화'의 결과물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습관의 생각을 거부하는 생각의 습관'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그 지점이 사실은 가장 새로운 아이디어가 숨어 있는 노다지일 수 있다. 고정관념이 극복해 낸 '한계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세상을 뒤흔들 통찰이 태어난다.
숫자는 표정일 뿐, 마음이 아니다
현대인은 숫자를 맹신한다. 데이터와 통계는 객관적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판단을 지배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소중한 모든 것을 숫자로 셀 수는 없다.
"숫자는 표정입니다. 마음은 알 수 없습니다. 숫자는 상징입니다.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숫자는 현상의 결과물일 뿐 그 이면의 동기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시장 조사를 할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며 거짓 답변을 내놓는다. 숫자에 매몰된 기획자는 사람의 '마음'을 놓친다. 혐오 시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단순히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이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그 입체적인 마음의 결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타스케가 말하는 통찰의 실체다.
삶을 향한 성찰: 발명가가 아닌 탐험가로 살기
우리는 흔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발명가'가 아닌 '탐험가'가 되라고 조언한다. 아이디어는 무(無)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현상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실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되며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의견들, 상식이라는 잣대로 재단된 몰상식한 생각들 속에 진정한 가능성이 숨어 있다. 상식은 과거 경험의 축적일 뿐, 미래의 진리는 아니다.
글을 마치며 나는 나의 '중위권 인생'을 다시 정의해 본다. 내 인생이 지루했던 이유는 환경 탓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프로세스라는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두었기 때문이었다. 목표와 수단을 혼동하고 남들이 정해준 정답을 정답이라 믿으며 생각의 게으름을 효율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왔다.
이제는 습관이 가리키는 방향의 반대편을 응시하려 한다. 꽃집 할머니의 주름에서 한 여자의 일생을 읽어내고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타인의 진심을 궁금해하며,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타스케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결국 하나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생각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타인의 습관으로 살았는가."
나만의 '마티니'를 조주 하듯 나만의 사유로 빚어낸 결론들이 내 삶을 채우길 소망한다. 비록 그 과정이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할지라도, 그것만이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인간 존엄의 증거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