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 김금희

얼음 아래에 빗금을 긋는 일은

by 세잇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깨진 곳을 메우는 충전,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수술, 그리고 원래의 형상을 찾아주는 복원. 하지만 정작 고쳐야 했던 것은 도면 위에 그려진 건축물이 아니라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나라는 사람의 깨진 파편들이었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며 나는 문장마다 멈춰 서서 내 마음의 균열을 확인해야 했다. 이 소설은 창경궁 대온실이라는 투명하고도 단단한 역사의 공간을 빌려 상처 입은 개인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수리하며 나아가는지를 집요하고도 다정하게 추적한다.


김금희 작가는 언제나 ‘마음에 이는 무늬’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관찰자다. 작가의 전작들이 그러했듯 이번 작품에서도 인물들은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위태롭게 걷는다. 화려한 영웅의 연대기 대신 엑스트라처럼 밀려나 있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특히 이번 소설은 처음 선보이는 역사소설로, 일제강점기의 흔적인 창경궁 대온실 아래 묻힌 비밀과 현재의 영두가 겪은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교차시킨다. 김금희 작가의 문장은 차갑지만 온기를 품고 있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예리하게 상처를 파고들면서도 결국 그 얼음이 녹아 물이 될 것임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인공 영두는 대온실 보수공사 보고서를 쓰는 일을 맡으며 과거의 기억이 서린 장소인 '원서동'과 재회한다. 그녀에게 원서동은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던’ 장소다. 중학생 시절, 섬마을 석모도를 떠나 서울로 유학 왔던 영두에게 낙원하숙에서의 기억은 서늘한 침묵과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다. 첫사랑 순신과의 풋풋했던 기억조차 ‘단무지’라는 시시한 핑계 뒤로 숨겨야 했던 이별의 상처와 섞여 있다. 소설은 영두가 대온실의 구조를 파악하고 땅 밑의 비밀을 발굴하는 과정과 그녀가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낙원하숙 시절의 진실을 대면하는 과정을 평행하게 배치한다.


문장 하나가 마음을 울린다.

“겨울이면 얼음이 두껍게 얼어 마치 연못이 닫힌 듯하지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천천히 움직이는 잉어들이 그 폐쇄의 풍경에 빗금 같은 균열을 내고 있었음을.”


우리는 흔히 불행이 찾아오면 삶이 완전히 멈췄다고 생각한다. 꽁꽁 얼어붙은 연못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폐쇄된 풍경 아래에서도 생명은 움직인다. 얼음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음 아래에서 빗금을 내며 견디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상처를 통과하는 방식이라는 통찰이 소설의 핵심을 관통한다. 영두가 마주한 진실들, 문자 할머니가 평생 숨겨온 일본 이름 ‘마리코’의 비밀 역시 그 차가운 동결의 막 아래에서 숨 쉬고 있었다.


삶에서 우리가 얻는 성찰은 아주 시시한 것들에서 비롯되곤 한다. 영두가 마당에 널린 가오리를 보며 “고작 그 시시함으로” 마음의 평평한 균형을 찾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거창한 위로나 해결책이 아니라 단무지 씹는 사각거리는 소리, 문자 할머니의 연례행사인 비릿한 빨래 삶는 냄새, 순신의 뒤에 올라탄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느껴지는 바람의 무게 같은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대단한 헌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저 “잘 왔다, 잘 왔어”라고 말해주거나,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라는 무력 하지만 진실한 기도를 공유할 뿐이다. 이것이 김금희가 말하는 ‘알맞은 온도의 이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수리’라는 단어의 새로운 정의를 얻었다. 수리는 과거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이어 붙이고 썩은 나무 기둥에 새 살을 덧대어 현재를 지탱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다. 영두가 “이제 내가 그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네,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라고 덤덤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길 바라는 욕심이 아니라 상처를 일상의 풍경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무서워서, 부끄러워서, 힘이 없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모든 이유를 뒤로하고, 결국 “다 해결되었어요”라고 말하며 타인의 손을 잡는 순간, 대온실의 보수공사는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나와 당신의 문장이 어떻게 서로를 구원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뱉는 냉랭한 말들이 “깊숙한 모자처럼 정수리를 덮어 시야를 어둠에 잠기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때로는 믿어야 살 수 있어서 누군가를 믿게 된다”는 고백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역사가 슬픈 것은 미완으로 남은 소망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 미완의 틈새를 메우는 것은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옆 사람의 에너지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나의 해묵은 보고서를 떠올려본다. 내 인생의 대온실은 어디쯤이 썩어 있고 어떤 유리가 깨져 있던가. 들여다볼 자신이 없어 억지로 닫아두었던 마음의 연못 아래에서 나는 여전히 빗금을 내며 움직이는 잉어를 발견할 수 있을까. 김금희 작가의 말처럼 상처는 집을 짓는 데 꼭 필요한 문고리나 창틀 같은 소재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없으면 집은 완성되지 않으며 그 상처를 하나씩 수리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곧 ‘산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은 내게 하나의 기도와 같았다. 당장의 해답을 얻지는 못했더라도 내 안의 슬픔이 녹아 없어지기를. 혹은 그 슬픔과 함께 고요하게 미풍이 부는 바다처럼 서 있을 수 있기를 바라는 법을 배웠다. 잃어버린 모두를 되찾는 낙원은 현실에 없을지라도 잃어버린 기억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우리에게는 가장 빛나는 대온실이 아닐까. 찬란하고도 아픈 그 유리 천장 아래에서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안녕을 묻고 각자의 보고서를 정성껏 수리해 나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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