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고 이어지는 것들에 대하여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김인숙
나와 당신의 문장은 때로 타인의 삶이라는 거대한 우주에 가닿는 가느다란 치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김인숙의 소설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를 읽으며 줄곧 분절과 연결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생각했다. 이 소설은 사기를 당해 집을 날리고 딸 은율의 1.5룸 오피스텔에 얹혀살게 된 엄마 ‘유자’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풍기는 기묘하고도 망측한 기운은 소설 속에서 ‘인생의 무서움’이라는 실존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김인숙 작가는 1983년 등단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 내면의 날카로운 칼날과 그 너머의 허망함을 집요하게 응시해 온 작가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녀는 ‘모녀’라는 가장 가깝고도 끔찍한 관계를 통해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삶의 민낯을 우주적인 시선으로 확장한다.
소설 속 유자는 암벽 공원을 찾는다.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무엇이 무서워서 저토록 매달려 있는 것일까, 혹은 무엇이 무섭지 않아서 저렇게 오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한다. 유자에게 삶은 늘 ‘무서운 것’이었다. 평생 국수를 말아 팔며 정직하게 살았다고 믿었지만 결과는 사기꾼에게 마음과 재산을 모두 내어준 뒤 딸의 좁은 방 한 칸을 침범하는 염치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 말이 기억에 남았던 건 그때 유자에게도 그런 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잠깐은 엉덩이만 자고, 잠깐은 다리만 자고, 또 잠깐은 눈이나 코, 입 같은 것만 번갈아 잘 수 있다면, 손님에게 국수를 내놓으면서 맛있게 드세요, 말하며 활짝 웃을 때에도 실은 자신의 등이나 어깨 어느 한 근육, 혹은 엄지와 검지 발가락은 침을 흘리며 잘 수 있다면.
유자의 이 고단한 상상은 눈물겹다. 온몸이 온전히 쉴 곳 하나 없어 부위별로 교대 근무하듯 잠을 청하고 싶다는 갈망.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의 부족함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심지어 사랑하는 딸에게—재앙이 되어버렸다는 자책에서 기인한다.
은율의 오피스텔에서 유자는 딸의 남자친구가 쓰는 치실을 몰래 쓴다. 치실을 끊어낼 때마다 유자는 자신 역시 ‘싹둑싹둑’ 끊기는 기분을 느낀다. 이 싹둑거리는 소리는 유자가 평생 국수를 썰며 내던 소리이기도 하다. 생계를 잇기 위해 내던 경쾌한 리듬이 이제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잘라내는 가위질 소리로 변모한다. 나를 지탱해 주던 성실함이 어느 순간 나를 옥죄는 공포가 될 때, 인간은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가.
유자는 기억한다. 딸 은율을 길 한복판(구급차 안)에서 낳았던 순간을. 그녀는 그것을 ‘징그럽게 낳았다’고 표현한다. 지구라는 거대한 구체 위에서 우리가 흔적을 남기는 모든 곳은 결국 ‘길 한복판’이다. 화려한 병원 침대 위든, 차가운 아스팔트 위든 생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은 고귀하기보다 차라리 비명이 섞인 징그러운 생명력에 가깝다. 유자와 은율의 관계도 그렇다. 서로의 팔다리가 찢어질 듯 붙잡고 있지만 실은 누가 먼저 손을 놓아버릴지 눈치를 보는 위태로운 형국이다. 미안함과 증오가 뒤섞인 그 좁은 방 안에서 모녀는 서로를 핥고 할퀴며 간신히 버틴다.
소설의 후반부. 유자는 전시회에서 우주인의 사진을 본다. 무중력 상태에서 둥둥 떠 있는 우주인. 그 광활한 스페이스 속에서 우주인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고립되어 있다. 유자는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자기만의 방’ 혹은 ‘스페이스’는 물리적인 평수(坪數)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기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된 절멸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허블 딥 필드’를 언급한다. 수많은 은하가 찍힌 그 아름다운 사진은 실은 은하들이 서로를 집어삼키는 동족상잔의 기록이다. 멀리서 보면 찬란한 우주의 신비지만 가까이서 보면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유자가 사기꾼 최 씨에게 느꼈던 그 모호한 감정, 딸의 방에서 느끼는 그 지독한 수치심, 국수를 썰며 느꼈던 생의 공포들. 이 모든 비루한 감정들이 모여 멀리서 보면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이름의 별자리가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유자의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사기꾼 최 씨가 유자의 손을 잡으며 건넨 말, “누구나 무서워”라는 한마디가 작지만 묵직한 위로로 남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무섭다. 좁은 방에서 이마를 찧으며 잠드는 것도 무섭고, 평생 국수만 말다가 죽는 것도 무섭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것은 더더욱 무섭다.
그러나 그 무서움을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타인과 연결된다. 나만 무서운 게 아니라 당신도 무섭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싹둑 끊기던 치실 같은 관계는 비로소 서로를 지탱하는 가느다란 실이 된다.
유자가 암벽 공원을 찾았던 이유는 절벽에 매달린 사람들의 근육 속에서 자신과 같은 공포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길 한복판에서 혹은 1.5룸이라는 작은 우주에서 각자의 절벽을 오르고 있다. 그 걸음이 비록 징그럽고 망측할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서로의 치실을 빌려 쓰고 밥을 나누어 먹는 한 이 남루한 생은 아름다움이라는 오해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결국 나와 당신의 문장은 이 좁은 방 안에서 서로의 살을 맞대고 부대끼며 써 내려가는 비명 섞인 글이 아닐까. 김인숙 작가가 그려낸 유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오늘 내가 잘라낸 수많은 싹둑 소리들을 가만히 복기해 본다. 그리고 그 소리 끝에 매달린 누군가의 무서움을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함께 나누어 짊어지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