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릴 수 있다면, 멈출 수 있다면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목하 작가의 『돌이킬 수 있는』을 덮었다. 환승역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쳤다. 내릴 곳을 놓친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유독 내려서도 한참을 걷지 못했다. 윤서리라는 주인공이 자꾸 떠올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 무엇이든 다시 할 수 있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을 잃고 또 잃는 사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가정은 이제 진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질문을 낭만이 아닌 고문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시간을 돌린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지를 두꺼운 페이지 속에서 집요하게 증명해 낸다.
단도를 쥔 손이 멎은 자리에서
소설은 한 여자가 칼을 쥐고 남자를 찌르려다 실패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칼자루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밀어도 칼은 더 나아가지 않는다. 시간을 멈추는 남자와 시간을 되돌리는 여자의 능력이 맞부딪힌 순간이다.
무언가를 결심하고 팔을 뻗었는데 도중에 멎어버리는 경험은 꼭 초능력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오래전 아버지의 병상에서 몇 번이나 손을 뻗다 멈추곤 했으니까. 손을 잡을까, 뭐라고 말을 건넬까, 이 말이 마지막이 되진 않을까. 수많은 망설임 속에서 내 팔은 자주 길을 잃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멎어있던 순간들이 결국 내 평생의 후회로 고인다는 것을.
윤서리는 칼을 멈춘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아니 결국 그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돌리고 또 돌린다. 처음엔 복수였고 그다음엔 목적이었으나 마지막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한다. 살인자로 시작한 여자가 구원자가 되는 이 여정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깊이 알게 된 뒤에도 여전히 미워할 수 있을 만큼 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작가가 정확히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산 하나가 가라앉은 자리
소설 속 '싱크홀'이라는 재난은 잔인하다. 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며 그곳을 터전 삼던 일상을 지하로 삼켜버린다. 비극의 구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시간을 멈추거나, 되돌리거나, 부수는 기이한 힘을 얻는다.
이 설정을 읽으며 온다 리쿠가 그려냈던 '상실 이후의 풍경'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비극은 한 세대를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월호를, 혹은 삼풍 백화점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 커다란 슬픔은 언제나 지도를 바꾸고 그 자리에서 기어 올라온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공기로 숨 쉴 수 없다.
작중 조대홍이란 인물은 국경을 넘으며 친부모를 잃고 싱크홀에서 양부모를 잃었다. 탈북 이야기는 덤덤히 해도 싱크홀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말해질 수 있는 슬픔과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슬픔의 차이다. 나에게도 그런 침묵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주의 일들을 15년 넘게 함께 산 아내에게조차 차마 다 털어놓지 못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내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균형 하나가 무너질 것만 같아서. 조대홍의 깊은 침묵 위에서 나는 내 안의 닫힌 문을 보았다.
아슬아슬해야만 살 수 있는
권력 조직 '비원'을 향한 일갈은 소설 밖의 내 삶으로도 자주 넘어왔다.
"비원이 아슬아슬해서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아슬아슬해야만 살 수 있는 거야. 살려면 아슬아슬해 보여야 하니까."
안정되어 보이는 사람은 실은 평온해서가 아니라 안정적이어야만 살 수 있기에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을 뿐이다. 매일 아침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행위는 그 삶이 견고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견고해야만 유지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간절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경선산성과 비원의 전쟁은 10년을 끌었으나 바깥세상은 무관심하다. 응원하는 자도 중재하는 자도 없는 그 고독한 전쟁은 당사자에게는 일생을 건 투쟁이지만 외부인에게는 그저 불필요하게 화려한 소란일 뿐이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필사(必死)의 게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시간과 소중한 것들을 잃어간다. 우리의 삶 또한 종종 그토록 화려하고 고독한 전장이 되곤 한다.
거짓말이 지키는 생명들
"정직은 신용을 지켜주지만, 거짓말은 생명을 지켜주거든." 이 문장 앞에 시선이 한참을 머물렀다. 정직을 최고의 가치라 가르치는 세상에서 어느 나이에 이르면 거짓말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아버지는 마지막 몇 달 동안 당신의 통증을 삮여 넘겼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예후를 삼켰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 복잡하고 슬픈 침묵의 연대가 우리 가족을 마지막까지 지탱했다. 거짓이 생명을 살리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서로를 놓지 않도록 붙잡아주었음은 분명하다.
"한 번 거짓말할 때마다 한 사람이 더 살 수 있다면 난 매일 거짓말을 하며 살아도 괜찮아요."
소설 속 누군가의 이 고백은 작품 전체의 심장처럼 느껴진다. 어떤 진실은 파괴하지만 어떤 거짓은 기어코 살려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잔인한 구분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일 것이다.
삶이라는 우연의 지옥
최주상의 딸은 돈이 없어 병원에서 퇴원한다. 현대 의학은 아이를 구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통장은 그럴 수 없었다. 어떤 비극은 악인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아버지가 되는 것만으로도 완성된다. 나는 운이 좋았을 까. 아버지의 병원비 앞에서 망설인 적은 있어도 퇴원을 결심해야 하는 지옥까지는 가보지 않았으니까. 그 행운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종류의 절망을 면하게 해 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아이에게 햇볕을 쬐게 해주고 싶었던 고작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어둠이 된다. 삶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무참함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우연뿐이라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다. 딸아이와의 여행을 자꾸만 다음으로 미뤄왔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책을 덮고 서둘러 일정 하나를 비워본다. 딸과 어딘가로 가야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딸이 내뱉을 툴툴댐조차 남김없이 기억해 두어야지. 그 하루가 우리 중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우리는 알 수 없겠지만.
결말은 달라지지 않아도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설에서 가장 단호하고도 서글픈 구절이다. 윤서리는 수백 번 시간을 되돌리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는 절망의 지점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고 사건의 구조는 인간의 의지보다 강할 테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나는 아마 같은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비극은 또 다른 모양으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윤서리는 시간을 돌린다. 결말이 같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셋, 둘"을 세며 돌아가는 그 어리석음.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정여준은 그녀가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스스로 갇힌 시공간을 늘려가며 그녀를 기다린다. 한쪽의 자유를 위해 다른 한쪽이 감옥을 자처하는 이 기이하고 숭고한 헌신 앞에서 나는 오래 서성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꿈속에서 나는 종종 시간을 되돌리는 사람이 되었다. 매번 아버지를 구했고 매번 깨어나 빈자리를 확인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내 안에도 결말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 밤마다 다시 시작을 빌어대는 어리석은 윤서리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왜겠어요
소설의 마지막. 정여준은 찬란하게 미소 지으며 묻는다.
"왜겠어요."
답이 없기에 이 질문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완벽한 답이 된다.
왜 시간을 멈추는가. 왜 자기 생을 깎아 누군가를 살리는가. 왜 이토록 고단한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가. 이유가 있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나서야 이유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결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딸이 언젠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도 그저 웃고 싶다. 왜 그렇게 참았느냐고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미소를 배우고 싶다. "너를 위해서"라는 가벼운 말도, "나를 위해서"라는 이기적인 말도 삼킨 채 모든 이유를 갈음하는 그런 웃음.
P.S.
서리 씨,
혹시 이 글을 어떤 시공간에서 읽게 된다면 한 번쯤 시간을 그대로 두어 주세요.
되돌리지 말고, 멈추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아주세요.
결말이 달라지지 않기에 이 한 번뿐인 시간이 더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오늘도 지하철에서 내릴 곳을 지나칠 것입니다.
밑줄 친 문장들을 되감아 읽고
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아버지의 사진 앞에 머물 거예요.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혹은 되돌려도 다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을 더 단단히 살아갑니다.
당신의 어리석음에 경의를 표하며
나의 어리석음도 조금은 용서받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