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준비 증후군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나는 이상하게 슬프고 우울했다.

by 이솔

동생은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의도 더현대에 가서 핸드폰 케이스를 파는 일이었는데, 하루 꼬박 서서 일하고 일급 10만 원을 손에 쥐는 내 동생은 매대 위 15만 원짜리 플라스틱 케이스를 팔았다.

동생이 바쁘니 여행 계획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애초에 엄마에게 계획을 맡긴다는 옵션은 없었다. 차라리 혼자 하는 게 속 편하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총대를 멘 이상 이번 여행은 가성비 유럽 여행이 될 예정이었다. 일단 세 명의 14박 15일 예산을 천만 원으로 잡았다. 비행기 티켓이 인당 왕복 120만 정도 들었다. 니스로 들어갔다가 로마에서 돌아오는 다구간 티켓이라 좀 더 비쌌다.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활용해 하루에 13만 원에서 25만 원 사이로 예약했다. 파리나 피렌체 같은 관광지가 아니라면 10만 원대 숙소로 타협을 봤다.


아무래도 근속 4년을 채우면 주는 리프레쉬 휴가는 이직률을 낮추려는 고도의 계략이 분명하다. 나는 휴가를 앞두고 퇴근 후 남는 시간을 꼬박 여행 준비에 할애해야 했다. 이직 준비는커녕 글 한 줄 쓸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코스를 짜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기본적인 이동 수단과 잠자리를 예약하는 데만도 밤을 새기 일쑤였다. 늘 출발 2주 전쯤 즉흥적으로 결정 내리고 떠나는 동남아 여행에 익숙한 내게 유럽여행 준비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유럽여행까지 한 달이 남았으면 한 달 내내, 아마 반년이 남았대도 반년 내내 계획만 짰을 것이다. 큰돈이 들어가는 데다가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유럽인만큼 모든 선택을 망설였다.

출발이 이 주쯤 남았을 때 문득 ‘다 때려치우고 패키지여행을 갈까’ 싶었다. 세미 패키지 같은 자유로운 상품도 많다던데, 취향 다른 세 여인을 만족시키기엔 그 편이 낫지 않을까. 여행사 홈페이지에 ‘프로방스 패키지여행’을 검색해 보았다. 프랑스 한 나라만 도는데 인당 천만 원에 육박했다. 그 숫자를 본 순간, 거짓말처럼 견딜만해졌다. 또 어떤 날은 집 근처 무인카페에 가부좌를 틀고 새벽 3시까지 이탈리아 기차 이딸로 티켓을 예매했다. 잊지 않고 여행자 보험도 들었다. 사망 시 보험금을 1억에서 3억으로 상향 조정해서 가입했다. 만약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데 슬프기만 하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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