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김에 꽃이라도 보자
인천에서 니스로 가는 직항 편이 전무했기에, 니스에 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경유를 해야 했다. 열심히 비행기 티켓 가격 비교 사이트를 뒤지다가 루프트한자에서 세트로 묶어서 판매하는 경유 항공권을 구매했다. 경유라고 저렴하지도 않았다. 인천에서 뮌헨을 들러 니스로 입국한 다음, 로마에서 취리히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티켓이었다.
엄마에게 효도하러 떠나는 여행인데, 연로한 어머니께 비즈니스석 태워 주진 못할 망정 직항도 아닌 경유를 태우다니.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명희씨에게 우리의 경유 계획을 말하자, 그는 경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독일도 가보고 좋은데? 언제 뮌헨 공항에 가보겠어.”
엄마의 긍정에 힘을 얻었다. 사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서너 시간 더 걸리지만 평생 가볼 일 없을 뮌헨 공항도 가보고, 운이 좋다면 취리히 공항에서 알프스 산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봉천동 자취방에서 엄마는 의정부 집에서 출발했다. 11시 40분 비행기이니 넉넉히 여덟 시쯤 인천공항 1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공항버스보다 저렴한 공항 철도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늦는 바람에 만 칠천 원짜리 공항버스를 탔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덕에 많이 늦지는 않고 딱 여덟 시 반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2주 동안 회사를 비우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느라 짐 챙길 시간이 없었고, 밤을 새 가며 캐리어를 싼 탓이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한숨 자려는데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6:30 버스 타려고 했는데 넘 일찍 와서 5:30 차를 탔지 뭐야^^”
나의 답신은 “못살아”였다. 그녀는 7시 16분에 이미 인천공항이었다. 출근하는 승무원들이랑 같은 버스를 탔다고 한다.
엄마는 루프트한자 카운터와 멀지 않은 곳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다행히 카운터는 널널해서 티켓 발권과 짐 부치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 26인치 캐리어는 13킬로, 엄마의 20인치 캐리어는 14킬로였다. 엄마의 아담한 캐리어는 이미 확장 지퍼를 열어놓은 상태였는데 알고 보니 그 안에는 전투식량과 볶음김치 캔이 한가득이었다.
바리바리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공항에 한 시간 일찍 나온 엄마에게서는 설레는 기색이 느껴졌다. 잠시 엄마를 혼자 두고 은행에 들러 미리 환전해 온 유로를 찾아왔는데 그 짧은 찰나에 엄마는 유튜브 정치 뉴스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프랑스에 가서도 한국의 정치 상황을 실시간으로 듣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그러나 빠르게 진정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여행에서는 엄마에게 화내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핀잔은 더더욱 주지 말자고. 엄마가 아니라 친구였다면 어떻게 대했을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부디 엄마가 지금 가진 설렘과 기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가 공항에 이토록 빨리 당도한 까닭은 바로 라운지 때문이었다. 작년에 혼자 베트남에 갈 때 라운지를 처음 경험해 봤다. 알고 보니 매일 사용하던 알뜰교통카드에 라운지 혜택이 포함되어 있었다. 분주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떡볶이를 먹는 기분이란. 위스키 다섯 샷을 넣은 하이볼을 만들어 먹으며 기필코 가족들과도 라운지를 찾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엄마에게 무실적으로 라운지에 갈 수 있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라고 알렸고 엄마와 첫 라운지를 가게 된 것이었다.
탑승구와 가까운 동쪽 라운지를 향해 앞장섰다. 절반쯤 갔을 때 엄마가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1 터미널에서는 서쪽 마티나 라운지가 제일 낫대. 거기 가자.”
블로그에서 미리 라운지 꿀팁 같은 글들을 찾아봤던 모양이다. 나에게 티를 안 내서 몰랐는데 꽤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서쪽 라운지까지 한참 걸어야 했다는 점이다.
“한참 걸어야 될 텐데 괜찮겠어?”
걷기 싫은 마음에 엄마를 회유하고자 물어본 건데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응 소화되고 좋지 뭐” 귀찮은데 그냥 동쪽 라운지 가자는 말이 입술 근처까지 나왔다가, 가까스로 그 말을 삼켰다. 결국 15분 정도 걸어 서쪽 마티나 라운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정말 여기가 가장 좋다고 소문이라도 난 건지 긴 줄이 서있었다. 다른 라운지 가자는 말이 다시 튀어나왔다가 엄마의 기대하는 눈초리를 보고는 조용히 기다렸다.
라운지 줄은 금방 줄어들었다. 다들 떠날 시간이 정해진 사람들이다 보니 회전이 빠르다. 운 좋게 공항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를 잡았다. 손을 씻고 오겠다는 엄마를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돌아오면 같이 음식을 담으러 갈 생각이었다. 5분이 지나도 엄마가 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어 화장실에 가보려고 엉덩이를 떼는 순간, 저만치서 이미 접시를 채우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집은 엄마가 독립적이고 딸이 분리 불안인 게 확실하다.
서쪽 라운지라고 해서 특출난 것은 없었다. 메뉴 구성은 동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떡볶이 컵라면 불고기 비빔밥 같은 기본 메뉴에 약간 특색을 더한 유린기나 만두 같은 별식이 추가되는 식이었다. 다만 술의 종류가 달랐다. 동쪽 라운지에서 봤던 위스키가 여긴 없었다. 아쉬운 대로 맥주와 와인을 잔에 가득 채웠다. 나는 한국을 떠난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괜히 불고기 김치를 수북이 쌓아 먹었는데 오히려 엄마는 태연했다. 내가 비빔밥과 라면을 입에 욱여넣을 때 엄마는 우아하게 샐러드에 요거트를 곁들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방에서 수면 유도제를 꺼냈다. 여행을 준비하며 종로 보령약국에 상비약을 사러 갔다. 감기약 소화제를 사고 약사에게 “혹시 수면 유도제가 있냐”라고 물었다. 시차가 완전히 뒤바뀌는 유럽인만큼 인터넷 소설에서나 보던 그 약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있다는 약사의 대답에 나는 마약 가격 물어보듯 은밀한 목소리로 얼마냐고 물었다. 단돈 천 원이었다. 고민 없이 구매했다. 원래는 엄마의 컨디션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건데 정작 엄마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결국 나 혼자 입에 털어 넣었다.
엄마는 라운지에 꽤 만족하는 눈치였다.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다음에 또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꼭 위스키가 있는 라운지로 데려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다음이 언제가 될지 어디가 될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기약 없는 다음을 떠올리자 잠시 마음이 까끌해졌다. 부른 배와 알딸딸한 취기를 안고 우린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소화도 시킬 겸 나쁘지 않은 산책이었다. 걷다 보니 역시 엄마 말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리 모바일 체크인을 한 덕에 비행기 왼쪽 창가 자리를 배정받았다. 뮌헨까지 11시간이나 걸리는 장시간 비행이다 보니 혹시나 해서 “화장실 가기 편한 복도 자리에 앉을까?”하고 물어봤다. 그러나 엄마는 “무조건 창가 자리가 좋아”라고 했다. 나는 참 엄마를 모른다.
엄마를 창가에 앉히고 나는 가운데 좌석에 앉았다. 나의 오른편에는 교수님 같은 중년의 백인 여성이 앉았다. 그는 계속 노트북으로 일했다. 우리 앞에는 할리우드 배우처럼 생긴 금발 백인 커플이 앉았다.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키스를 해댔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가 좌석을 너무 뒤로 뺀 나머지 잘 보였다.
밤을 새고 수면유도제를 마신 나는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아찔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자 얼른 잠들려고 노력했는데 몸이 공중에 뜨니 귀신 같이 잠이 깼다. 요 근래 항공 사고 영상을 찾아본 탓에 겁이 났다. 무서워서 은근히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도 무서운지 내 손을 꽉 잡았다. 몇 년 만에 잡는지도 모를 만큼 오랜만에 맞잡은 손이었다.
정상 고도에 오르자 기내식 서빙이 시작됐다. 담당 승무원은 마른 얼굴에 까만 안경을 쓴 백인 남성이었는데 반 고흐가 살아있다면 이런 얼굴이었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프랑스에서 반고흐의 마을, 아를에 머물 예정이었다. 거기서 만나게 될 고흐의 흔적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출발하기 2주 전부터 미리 특별 기내식 저나트륨식을 신청해 두었다. 엄마를 위한 저나트륨 식단이었다. 흰 살 생선과 토마토소스, 코우슬로 샐러드가 전부였다. 하나는 일반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받아 엄마와 나눠먹을 생각이었는데, 비빔밥을 받을 때쯤 이미 엄마는 저나트륨식을 다 먹은 상태였다. 맛이 없다고 하면서도 이미 다 먹은 거 보면 입에 맞았던 모양이다. 독일 항공사의 비빔밥도 나쁘지 않았다. 남은 여행을 위해 비빔밥에 넣지 않은 참기름팩을 가방에 넣었다.
“캔 아이 해브 어 제로 코크, 앤드 레드 와인 포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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