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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눈 May 26. 2023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

올해 수석교사가 되며 교육청으로부터 많은 요청들을 받고 있다. 각종 연구회에 전국 단위의 연수나 연구회까지 참여해 달라는 요청들이다. 내 스케줄표는 앞으로 4주 치가 벌써 대부분이 차 있고 가끔 비어있는 날도 1~2주 전이 되면 어김없이 채워진다. 연수나 연구회는 사전 공부나 과제도 있어 별도의 시간이 또 필요한데 그러다 보니 점점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저녁이 연수나 출장으로 가득 차있고, 학교에서는 수업 외에도 수업 컨설팅, 회의, 교내 연수, 연구회 운영 등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요즘은 무언가 일을 덜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문득 가장 자주 정기적으로 가야 하는 금요일 교육학 공부모임을 그만두면 그나마 좀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살짝 고민하기도 했다.


과학과 신규 선생님들과 하는 공부모임도 살짝 소원해진 상태이다. 원래는 2주에 한 번씩 만나 공부를 했었는데 지난주 모임이 취소되면서 그다음 일정은 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내 스케줄은 이미 4주가 꽉 차 있어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한 달 후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쁜 날들을 보내다 보니 아직 스케줄을 잡지 못한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 탓일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함께 해 온 고등학교 과학과 연구모임이 있다.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연구회로 활동하며 함께 교육과정, 수업, 평가에 관해 공부하고 서로의 수업과 평가를 나누는 그런 모임이다. 학년말이 되면 한 해동안 각자 만든 자료들을 정리하여 자료집으로도 제작하고 발표하는 시간도 가지며 매년 서로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3명이었는데 한 사람씩 늘어나 지금은 물, 화, 생, 지 과목이 골고루 섞인 7명이 되었다. 이 모임에서 나는 거의 막내이다. 이 모임을 통해서도 참 많이 배우고 성장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공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는데 점점 교육청이나 연구원에서 우리에게 연수를 부탁하기도 하고, 사례집 제작을 요청하기도 하고, 온라인 콘텐츠 제작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우리는 또 치열하게 공부하여 선생님들께 연수도 하고 자료도 만들었다. 각자의 학교 생활 중에 과외로 해야 하는 일들이라 힘들었지만 한 가지 일들이 끝나고 나면 또 배우는 것들이 많이 있어 우리는 선뜻 그런 일들을 그만두지 못한 채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몇 해째 해오면서 우리가 너무 소진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한 달에 한번 모임 날짜를 잡기도 어려울 만큼 모두들 또 다른 연수와 업무들로 너무 바빴고, 교육청과 연구원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결과물이 점점 많아지며 큰 부담이 되었다. 올해는 우리 모임에서 운영해야 하는 것이 '1) 연구모임, 2) 평가 컨설팅 지원단, 3) 평가설계 연수 개발' 3가지가 되었다. 결국 지난 모임에서는 내년에는 일을 줄여보자는 제안이 나오게 되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을 줄이려고 보니 3가지 중에서 줄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1) 연구모임이었다. 나머지 2가지는 각각 교육청과 연구원에서 요청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내년에 뭔가 한 가지를 그만둔다면 우리가 맨 처음 시작했던 그 연구모임을 그만두어야 했다. 팀장님은 그 이야기를 꺼내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면서 속상해하셨다.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


내가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은 우리 모임이 일만 하는 사이가 아닌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임이길 바라셨던 거였다. 순간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늘 이 모임을 일을 해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모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란 어떤 의미이지? 나는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들과 함께 수석 교사가 되면서 요청받은 일들을 소화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게 질문들이 자꾸 생겨나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금요일 교육학 모임과 과학과 신규 선생님들과 하는 공부모임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수석교사로서 내 공부와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모임들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이 모임으로 인해 나는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시키는 일을 해 내느라 공부도 연구도 뒷전으로 하며 끌려가듯 지내고 싶지 않다. 내 공부와 연구를 최우선에 두고 실력을 갖춘 수석교사가 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 모임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이런 모임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더 성실하게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책을 읽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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