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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눈 Aug 18. 2024

난 잘 쓰이고 있다.

수업이 진심이 당신에게

방학이 되면 평소 만나지 못했던 여러 선생님들과 만날 약속을 하게 된다. 서로 아는 사이도 있지만 나는 주로 1대 1로 만난다. 그래야 진짜 하고 싶은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방학 때 만난 선생님은 5명이다. 지난 학교에서 같이 수업 모임을 했던 영어 선생님, 생물 선생님, 미술 선생님. 지지난 학교에서 같은 학년 담임이었던 수학 선생님, 동료에서 너무 친한 친구가 된 지구과학 선생님. 쓰고 보니 과목도 다 다르군.


'그렇게 만나면 무슨 얘기해?'라고 남편이 물었다.

'그러게.. 만나면 4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신나고 재밌는데 무슨 얘기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순간 깨달았다. 모두 수업 이야기!!




영어 선생님은 만나자마자 지난 학기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수업과 평가 이야기를 꺼냈다. 수업 과정에서 학생들이 어땠는지, 스스로 어떤 부족한 부분을 느꼈는지, 다음에 한다면 이런 걸 보완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또 2학기 때 해보고 싶은 수업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좋은 연설문을 소재로 수업을 해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배우게 하고 싶냐는 질문을 했다.


생물 선생님과 미술 선생님은 유일하게 함께 만난 분들이었다. 생물 선생님은 올해 새 학교에서 근무하는데, 그곳에서 수업과 평가를 계획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뜻대로 하지 못해 속상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미술 선생님은 고등학교에서 처음 맡은 업무 때문에 예전만큼 수업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속상해했다. 하지만 함께 근무하는 수석선생님을 통해 새로운 공개수업에 도전해 보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우리는 서로의 수업을 응원하며 각자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한다. 교과는 서로 다르지만 오히려 비전공자로서 신선한 관점이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수학 선생님과는 2년 만의 만남이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하고 싶은 말들이 넘쳐났다. 학생들의 과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평가에서 현실적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점에 대해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자신이 못 할 이유에 대한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내가 들은 수학 수업 이야기를 소개하며 또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못한 말이 너무 많았다.


지구과학 선생님은 항상 내가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것들에 관해 질문을 한다. 나를 계속 말하게 하는 선생님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질문하고 생각을 나눈다. 내 수업과 평가에 관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꿰어져 나온다. 질문도 끝이 없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판단해 주기도 하고 현실의 평범한 교사로서의 한계에 대해 나누기도 한다. 4시간을 이야기하고 헤어지는 중에도 하고 싶은 말이 계속 생겨나 집에 가서 카톡으로 또 자료를 주고받는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옆자리 동료들과는 정작 수업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다. 그때그때 해내야 하는 과제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교무실에서는 주로 업무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어떤 때는 각자 컴퓨터 속 업무를 처리하느라 고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선생님들은 자신의 수업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며 더 나은 수업을 모색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다. 특히 중고등학교에서는 교과의 장벽이 있어 대화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교과 선생님에게 내 교과의 수업 이야기를 이해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동교과와 가까운 공간에 있는 경우도 흔치 않다.


내가 만난 5명의 선생님들은 모두 나를 만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업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는 다른 교과이긴 하지만 함께 근무하던 시절에 수업 이야기를 함께 나눴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업 모임을 함께 한 선생님도 있고, 연구회를 오랫동안 같이 한 선생님도 있다. 내가 늘 수업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선생님들이라 나와 만나면 의례히 수업 얘기를 하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내 주변의 선생님들은 나와의 만남에 수업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솔루션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냥 생각을 듣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 전부이다. 선생님들은 자신의 수업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려고 말을 하면서부터 계속 수업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또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전후를 맞추어야 하고, 스스로 느껴오긴 했지만 말로 내뱉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적합한 언어도 골라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점을 마주하기도 하고 스스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의 질문에 답을 하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잘 쓰이고 있다.'


'사람'과 '수업'이 내가 수석교사가 되게 한 이유였으니 난 잘 쓰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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